헤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최초로 만난 정원사 겸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다. 오래전 헤세가 쓴 정원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서였다. 지금은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는 개정판으로 나와 있지만 그 당시 출판사에서는 헤세의 얼굴 사진을 표지 전체에 썼다. 마르고 주름지고, 흑백으로 표현되어 있어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검게 탔을 노인의 얼굴이었다. 밀짚모자를 쓴 헤세는 해바라기를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평소 헤세의 얼굴을 굳이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나는 적어도 뭔가 ‘적당하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헤세라고 하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느 맥락들, 청춘의 고뇌 혹은 철학과 종교에 대한 심미적 탐구와 거리가 있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 내가 가졌던 편견에 불과했고 이제 식물을 기르며 그것에 관한 소박한 글을 쓰게 된 나로서는, 물론 포도 농사로 생계를 꾸리기까지 했던 헤세에 비할 것도 아니지만, 그 얼굴이야말로 식물을 가까이하는 자가 짓는 가장 충만한 표정이라는 사실을 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 책을 떠올렸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가는 그 길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을 비롯한 여러 근심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깥풍경으로 여름 나무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좀 나아졌다. 행신역에 내려 친구를 기다리던 나는 그곳에 KTX가 선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대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다. 해야 할 마감들이 있고 예정된 일정이 있고 게다가 지금은 확진자가 통 줄지 않는 팬데믹 상황이 아닌가.
“너 지금 표정이 완전히 울 것 같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내게 그렇게 일러주었다. 걱정되는 일들에 대해 하나둘씩 말했지만 그건 뭔가 지금의 내 기분을 알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듯했고 이내 나는 너무 고독해,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고독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그 고독이 지금 이 여름에 왜 내게 문제가 되고 있는지까지는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더 그럴 거야.”
“그래, 다들 그렇겠지.”
화제를 돌리려는지 친구가 키우는 식물들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얼마나 자랐니, 집에는 어떻게 두고 있니. 하지만 휴대전화 사진보관함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풍경이나 인물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캡처해둔 사진만이 가득했다. 모처럼 만난 친구 앞에서 영 밝은 표정을 짓지 못하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 안에 아주 차디찬 것들이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걸을 때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묵직하게 나를 누르는 이 아주 차가운 것.
식물에 관한 헤세의 산문들을 읽다 보면 그의 실제 모습들에 대해 알게 된다. 더 정확히는 헤세가 설명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모습들. 헤세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많은 편으로, 정원 일에 쓰는 주머니칼을 잃어버리자 크게 상심해 글 한 편을 쓰기도 했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가엾은 영혼들에게 위로를 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살면서 그런 밤을 보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폴리라는 앵무새를 기른 ‘앵무새 집사’이고 그래서 앵무새의 언어를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세계대전 이후 십년 동안 일상적인 교제 없이 사물과 정원의 식물들과만 교류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라는 산문에는 그런 그의 친구들에 대한 소개가 길게 등장한다. 산책 지팡이, 찻잔, 꽃병, 청동 조각상처럼 “말없이 나를 순종하고”·“하나라도 나를 떠나거나” 하면 상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가까운 존재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집밖에는 종려나무와 동백나무, 수양버들과 여름 목련 같은 헤세가 “진정한 내 친구들이고 내 이웃”이라 부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헤세의 목소리에는 어떤 쓸쓸한 관조의 톤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열렬한 찬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 어려서는 방황 끝에 자살 미수를 반복하고 전쟁 후에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칩거를 선택한 헤세에게는 고독이야말로 가장 열렬한 생의 의지가 되었던 것일까.
비슷한 시기 정원 속에서 삶의 환희를 발견했던 또 다른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다. 울프는 1919년 몽크스 하우스라는 교외 농가로 이사 가면서 이곳이야말로 “런던 모두를 합친 것보다” 좋다고 고백했다. 붉은색과 크림색 수련으로 가득한 연못,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무더기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 벌들의 윙윙거림, 낮은 노랫소리, 향기, 식물들이 뿜어내는 그 모든 것에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을 느끼는 울프의 모습이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울프는 그 정원 생활을 자신의 일기나 작품, 그리고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남겨두었다. 자신은 매일 아침 그 황홀한 정원을 건너가 어제 쓰다가 만 문장을 향해 부드럽게 나아간다고. 그 무렵 울프는 다가오는 또 다른 전쟁의 서막 앞에서 한없이 황폐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원의 식물들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작가로 산다는 것이 뭐가 가장 어려운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고독이 요구되는 점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쓰는 행위란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비평하고 객관화한다는 것이니까, 그 서늘한 거리감은 상시적이고 고립감과 닮아 있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뿐 아니라 모든 내면 지향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을 고독감 앞에서 어떻게 정원의 풍경들, 식물들은 내밀한 친구로 남아 있을 수가 있을까? 헤세는 인간에게는 죽음이 때로 보잘것없는 위안이 될 수 있으나 나무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 죽음을 부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무들에게는 “해마다 수백만 송이가 넘는 화려하고 찬란히 빛나는 꽃을 풍성하게” 피우는 삶의 근원적인 방향이 있고 그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일탈과 갈등과 번민을 무화시키는 자연의 강력한 힘이라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그러자 어떤 지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여름을 맞은 지금, 우리 집에서 가장 활력 있게 자라고 있는 식물은 필로덴드론 플로리다 고스트다. 노란 변이 잎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 유령 잎은 잎이 다 자라고 나면 다시 푸르게 변한다. 화원에서 그 식물을 고를 때 나는 잎이 얼마나 멋지게 나있는가보다는 뿌리가 튼튼한가를 자세히 보았다. 얼마 못 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정작 잎은 좀 밉게 나있는 포트를 골랐는데 계산할 때 화원 사장이 “괜찮겠어요?” 하고 다시 확인했다. 나는 “무엇보다 튼튼해야 하니까요.”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그 후로 우리의 고스트는 쑥쑥 자라 지금은 여섯 개가 넘는 줄기와 넓은 잎을 냈다. 그런데 새잎들이 그렇게 건강히 자라자 첫 잎은 점점 상해갔다. 나는 그 귀한 잎 하나를 잃는 걸 안타까워하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때 줄기가 아니라 잎을 조심히 잘라내었다. 혹시라도 줄기에 잎이 또 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내 바람과 무관하게 식물은 스스로 그 굵은 줄기를 뚝 떨어뜨려 버렸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내가 줄기를 물병에 담가두었지만 이번에도 생명의 기미란 없이 천천히 검게 변하며 말라갔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식물의 분명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헤세는 자신이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니 어쩌면 이 여름에 필요한 건 고독을 지우기 위한 다른 어떤 노력들보다 헤세가 〈여름 편지〉라는 산문에 남긴 이런 제안들일지도 모르겠다. 열흘 동안 화병에 꽂힌 채 시들어가는 백일홍 관찰하기, 그 잎의 뒷면도 세세히 들여다보기,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장미의 모습을 생생하게 감동적으로 응시하기. 그렇게 해서 삶의 무상함에 대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하여 소중히 받아들이기. 고독과 여름과 정원과 관찰, 이제 무르익고 있는 이 계절에 나는 아마도 이 말들에 대해 몇 번이고 떠올릴 것 같다.
김금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