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이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유칼립투스를 좋아한다. 허브 계열로 고대 이집트에서도 항료로 사용했을 만큼 살균 효과가 높고 향이 좋은 식물이다. ‘유칼립투스’(eucalyptus)라는 그리스어 자체에 ‘아름답게 뒤덮인다’라는 뜻이 있듯 기품 있고, 섬세하게 아름다운 녹색 잎을 달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가장 많이 죽인 식물도 유칼립투스다. 물을 많이 주어도, 물 주는 타이밍을 잠깐 놓쳐도 어느샌가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포기할 만도 한데 또 그 하늘하늘하고 푸른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재도전을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유칼립투스 폴리안은 유칼립투스 전문 농장에서 사 왔다. 유칼립투스는 호주가 원산지라서 건조한 환경과 강한 햇볕이 필요한데 농장에서는 화분들을 철판으로 된 지붕에 올려 기르고 있었다. 힘들게 자란 식물이 목대가 튼튼하고 잎도 두껍다고 했다. 그렇게 들이게 된 유칼립투스는 정말 겨울도 잘 넘기고 잘 자라주었다. 이사로 환경이 갑자기 변하고 나서도 괜찮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잎이 좀 마른다 싶더니 얼마 전 보니 잎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지를 뒤덮고 있는 흰곰팡이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식물을 기르고 실패하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얻은 마음 중 하나는 자포자기와 일종의 정신승리가 뒤섞인 채 어떤 운명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식물은 저마다의 힘이 있어서 죽은 듯싶다가도 다시 살아나고 꽃을 피우며 잘 지내는가 싶다가도 상태가 급격히 나빠질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일희일비할 것 없다가 아니라 일희일비하며 채워나가는 것이 발코니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나는 유칼립투스의 잎들을 남김없이 떼어냈다. 바스락거리며 잎들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물과 소량의 마요네즈를 섞어 가지를 닦아주었다. 흙에도 곰팡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약도 뿌려주었다. 잎이 하나도 없는 유칼립투스는 앙상하고 완전히 고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식물을 보는 것은 영영 닫혀버린 어떤 문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식물 스스로 열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다음 날들이란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보름쯤 지났을까, 유칼립투스는 기적처럼 새잎들을 내기 시작했다.
요즘은 워커 홀릭인 나 자신과 씨름하다시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작업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항상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잡아놓고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언젠가 후배에게 언니, 아마 올 한 해 언니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글을 쓴 사람일 거예요,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정말 가혹하게 나 자신을 밀어붙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 무렵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기적인 심리 치료까지 받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서 일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자꾸 강조해서 말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사람들에게 매번 일을 줄이고 있다고 밝혔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넌 아직 쉬는 걸 시작하지도 않았어.”라고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아예 없는 날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쉬고 있다고 강조했던 것일까. 친구는 일을 줄이는 것이 영 불안한가 봐, 하고 걱정했다.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까지 너는 정말 쉬어야겠다.”
그래도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분명한 변화였다. 나이가 들면서 욕심이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급한 것인지 여러 권의 책들을 동시에 읽을 때가 많다. 지금 읽는 책들도 소설에서 정신분석에 관한 책을 거쳐 식물에 관한 것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일관된 건 책을 읽는 자리에 언제나 식물들이 있다는 점이다. 거실에 나가 있으면 손이 닿는 곳에 제법 큰 크기의 브룬펠시아 재스민이 있어서 그 잎을 만지작거리며 읽게 된다. 전자책에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촉감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만졌던 종이의 질감,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그 얇은 펄프의 느낌을 전자책은 구현할 수 없으니까. 책을 읽다가 무심코 손을 뻗어 만져보는 식물의 잎은 폭신하고 촉촉하고 살아 있는 것 특유의 생기가 있다. 한때 식물이었던 것과 지금 식물이었던 것, 그 모든 세계를 누릴 수 있는 호사로움이 책 읽는 시간에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식물 책은 〈정원의 쓸모〉로, 식물을 가꾸는 마음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의 시를 사랑하고 프로이트를 연구한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식물을 기르면서 느꼈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더 전문적으로 알 수 있다.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다. 책에 따르면 식물은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던 누군가가 돌봄의 형식을 배워갈 수 있는 대상이다. 단순히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식물은 빠르게 반응하지 않으며,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움츠리거나 웃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적당하다. 어려서 제대로 된 관계 형성을 하지 못한 누군가는 상대가 약할 경우 폭력성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식물은 그런 잔혹성이 충족되지 않는 대상이다. 그러니 “안전하게” “분노, 애통, 좌절을 승화시키거나 창조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 “흙을 파고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는” “파괴를 통해 성장을 북돋는 돌봄의 형태”를 식물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원예 수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다가 사실 현대인이 쬐는 일조량, 곧 외부활동의 양을 따져보면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이 거대한 도시에 갇힌 수감자들이며, 적절한 파괴와 돌봄, 성장의 드라마, 그것을 통해 얻는 승화를 의도적으로 도모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여기에 완전히 동의했다.
언젠가 친구가 아이가 자꾸 꽃을 꺾고 싶어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혼을 내는데도 또다시 길을 가다가 풀을 뜯고 꽃을 망가뜨려 놓는다고. 나는 그걸 너무 제지하지는 말라고 이야기했다.
“일부러 가지를 쳐주기도 하는데 뭘, 사실 식물들에게 그런 손상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해.”
나는 식물이 그 자체로 보호받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떼거나 꺾어 놀잇감으로 삼으려는 아이의 마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식물을 풍경의 오브제로 삼곤 하지만 본래 식물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만지고 뜯고 냄새 맡고 먹는 것이니까. 만약 식물에게서 매번 고통을 상상한다면 식물을 기르는 방식은 매우 왜곡될 것이다. 잎을 떨어뜨리거나 가지가 휘거나 적절한 시기가 되면 꽃을 완전히 말려 떨어뜨리는 식물의 행태는 식물의 방식대로 읽을 때 비로소 본질에 맞는 자연적 행위가 된다. 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이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말에는 오랜만에 가평을 갔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는 거리인데도 거기에는 아주 여여한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수목원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숙소 근처 하천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는 남편에게 “이제 마음에 대해 그만 생각할까 해.”라고 말했다.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이란 내가 쓴 소설의 제목에도 들어갈 만큼 중요한 주제였고 몇 해에 걸쳐 심리 치료를 했을 만큼 내 인생에서도 절박했던 문제이니까. 나는 방금 한 말이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았고 “아니, 이제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할까 해.”라고 정정했다. 그러고 나서야 이 여름 내게 찾아든 변화가 더 정확히 표현된 것 같았다. 그건 더 이상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을 갖춰 정확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의미라는 걸. 상처의 기억과 트라우마라는 좁디좁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내 삶을 꺼내주고 싶다는 뜻이라는 걸. 그러니까 때로는 고통 없이 마음과 삶을 돌아보고 싶다는 바람이라는 걸. 하지만 그 설명은 하지 않았고 우리의 화제는 어린 시절 가족여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은 냇가에 앉아 있으니 가족, 친지들과 다녔던 여행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딱 이런 모양의 하천들이었는데, 막상 가면 어른들은 땡볕이 종일 떨어지는 냇가에 애들을 풀어놓고 관심이 없었다고.
나는 어른 중심의 여행이란 아이에게 무척이나 피곤하고 어떻게 보면 벌을 서는 기분이었겠다 동의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는 그런 가족여행의 기억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하듯 내게 없는 그것, 그 결락에 대해 말하려다가 멈추고 “저건 백로인가?” 하고 물었다. 하천 상류에 새 한 마리가 정물처럼 서서 우리를 건너보고 있었다. “왜가리인가?” 맞은편 하천 절벽에는 나무들이 경사를 붙들고 자라나 있었다. 개체 하나하나를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깊은 숲이었다. 나무들을 그렇게 보고 있자니 말은 멈춰졌고 그 순간 나는 새로운 기대를 품게 되었다. 아직 그것이 어떤 미래에 대한 기대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식물들에게서 매번 배우는 진실과 닮아 있을 것은 분명했다. 김금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