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롯데 자이언츠 염종석. 롯데 자이언츠 제공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어나지도 않은 새벽 6시께. 아침밥조차 굶은 초등학생들은 운동장 한쪽 구석이라도 차지하고자 종종걸음으로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은 이미 일찍 일어난 새들로 넘쳐났다. 사각형 운동장에는 모두 8개 팀이 한쪽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야구를 해댔다.
1982년 부산 서구 대신초등학교 운동장. 당시 이곳에는 사이드암 투수가 넘쳐났다. 롯데 원년 에이스 노상수의 후계자들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던지는 정통파 투수와 달리 옆으로 던지는 폼이 멋있어 너도나도 옆구리를 혹사했다.
나는 초·중·고 모두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졸업했다. 대신초등학교와 대신중학교 시절엔 일요일 운동장에서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본 야구부 감독님이 “야구부보다 잘한다”며 “야구부에 들어와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만 부모님의 간절한 만류로 선수의 길을 걷진 못했다.
내가 졸업한 경남고등학교엔 유독 개띠들이 유별나게 야구를 잘한다. 58년 개띠 최동원 선배와 82년 개띠 이대호 후배가 대표 인물이다. 70년 개띠인 내가 야구를 했다면 개띠 계보를 바로 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
‘야도’(야구의 도시) 부산엔 경남고·부산고·경남상고·부산공고·동래고 등 명문 야구부가 많았다. 그만큼 야구에 미친놈들도 널리고 널려있었다. 초기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던 구덕운동장 앞 문화아파트 베란다에는 비싼 입장권을 사지 못한 야구팬들이 넘쳐났다.
당시에는 7회초나 말이면 야구장 문을 열어줘 야구장 바깥에서 소리로만 야구를 보던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간혹 승부가 팽팽할 때는 야구장 문을 늦게 열어주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구덕운동장 옆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파출소 옆에는 철조망이 뚫린 개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깨에 올려 개구멍으로 넣어주기도 했다. 파출소 경찰들도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불법을 눈감아줬다. 아마 부산이라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때 롯데 성적이 8888577 행진을 했을 때도, 우리는 롯데가 무슨 신줏단지라도 되는 것처럼 버리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에게 ‘모태 롯데’라고 놀림을 받아도, ‘이제 그만 짝사랑하라’는 주변 권고에도 몸속에 깊이 박힌 롯데의 인은 빠지지 않았다. 아내와 아침 밥상머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다가도 스포츠 뉴스에서 롯데가 이겼다면 기분이 좋았으니 말이다. 내 삼촌께서는 한 때 야구장 관중이 50명에 불과했을 때도, 저녁에 제사가 있어도 야구장 직관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내가 삼촌의 디엔에이(DNA)를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 뒤 기뻐하는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트리플픽쳐스 제공
1984년 최동원이, 1992년 염종석이 우승을 이끌 때만 해도 롯데가 곧 다시 한 번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서른 해가 넘도록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것도 서른 번이 넘다 보니 가끔 내 생전에 다시 롯데의 우승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다시 노상수가, 다시 최동원이, 다시 염종석이 나타날 거라고.
안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중봉(경남 남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