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한겨레〉 스포츠팀이 준비한 ‘나와 너의 야구 이야기’는 30회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간 보내주신 독자분들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와, 방망이는 저렇게 돌리는 거구나.’
한 번 따라 해봤다.
‘이게 맞나?’
멀리서 지켜봤던 타격 폼을 방망이 없이 맨손으로만 흉내 내봤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과 ‘찜볼’을 할 때 곧바로 응용했다. 뭔가 폼은 그럴듯해 보였다.
나의 고향은 경남 진주.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를 했다. 구덕운동장이 바로 옆이었다. 구덕운동장에서는 야구, 축구, 농구, 프로레슬링까지 다했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장으로 가서 선수들을 지켜봤다. 운동을 좋아했던 터라 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었다. 백인천 선수가 야구 하는 모습도 그때 처음 봤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59년. 부산시에서 초등학교 대상으로 야구 대회를 열었다. 대신초 야구부는 꽤 강한 편이었지만 우승하기 위해서 야구부가 아닌 아이들에게도 테스트 볼 것을 아침 조회 시간에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반장이었던 터라 얼떨결에 테스트에 참여했다. 그런데 웬걸. 생전 처음 야구 방망이를 쥐고 휘둘렀는데 타구가 담장 밖을 넘어갔다. 얼떨떨했다. 그 다음 날부터 감독, 부장, 교감이 번갈아가며 야구부 가입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난 마음이 동했지만 부모님은 완강했다. 당시 나는 반에서 공부로 1~2등을 다투던 아이였다. 그러나 감독 등의 끈질긴 설득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다만 초등학교까지만 야구를 하고 공부도 절대 게을리하지 말라는 조건이 달렸다.
야구부에 들어가서 4번 타자를 했다. 우승도 경험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인지, 금방 야구부 훈련을 따라잡았던 것 같다. 구덕운동장에서 눈으로만 봤던 수많은 경기도 나의 좋은 참고서가 됐다.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나는 계속 따라 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곤 했다. 간접 경험이 그래서 중요하다. 눈으로도 얼마든지 야구를 배울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야구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도 이어졌다. 아버지와의 약속(공부)은 지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입증하고 싶었다. 야구 선수로의 길이 옳았다는 것을.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와서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주말에도, 명절에도 쉼 없이 나는 매일 밤 11시까지 개인 훈련을 했다. 그래서 후보 선수였던 적은 거의 없었다. 경남고 2학년 시절(1968년)에는 부산지구 고교 선발 내야수로 일본에 원정(8월14~31일)도 갔다.
경남고, 고려대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중에 야구를 관둬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다. 1976년 열린 한일 올스타전(대전)에서 수비 도중 왼발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4차례나 수술했지만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재활 시스템이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부상만 아니었으면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서 뛰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야구의 신은 그렇게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성격상 뒤를 잘 안 돌아본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놔둔다. 병원에서 미래를 고민하다가 공부를 시작했다. 고려대 법학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는데 합격할 자신은 적었지만, 운 좋게 붙었다. 이후 대학 시간 강사를 하면서 가끔 <동아방송>(1964년~80년 운영되었던 민영 라디오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아마추어 야구 중계를 했다.
프로야구 출범 뒤 〈문화방송>(MBC)에서 전속 해설위원 제안이 왔을 때 프로 A급 선수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당시 A급 선수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33평 가격만큼의 연봉(2200만원)을 받았다.(박철순은 특A급으로 연봉이 2400만원이었다.) 방송 해설자의 경우 회당 3만6500원을 받던 때였다. 대학 강사를 그만두기 싫어서 일단 질러본 액수였다. 이후 고민을 하다가 1000만원보다 조금 많은 액수로 전속 제안을 수락했다. 나와 프로야구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프로야구는 나의 숙명이 되어버렸다.
야구는 예측불허의 매력이 있다. 교만하면 당하고, 방심해도 당한다. 또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해야만 한다. 중간중간 밸런스도 점검해야만 한다. 끝날 때까지 절대 포기해서도 안 된다. 아웃카운트가 남아 있다면 끝까지 희망은 있다. 더군다나 야구는 팬들이 함께 상상할 수 있는 스포츠다. 우리 팀이 뒤지고 있는 9회말, 주자가 나가면 팬들은 제각각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감독처럼, 선수처럼 경기 안에서 역전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린다. 야구처럼 한 경기 안에서조차 희로애락이 농축된 스포츠가 또 있을까.
바깥으로 나가 보면 아마추어 선수였던 1960년대, 방송 해설위원이던 1980년대와 비교해 한국 야구 위상이 많이 달라져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숙제가 산재해 있다. 기업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관중 수도 줄고 있다. 아이들은 더이상 야구를 안 하려고 한다. 훈련 부족으로 기본기가 부족한 아마추어 선수도 많다. 프로 선수들의 의식구조 개선도 시급하다. 요즘 내가 잠을 못 이루는 이유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면 걱정거리가 둥둥 떠다닌다.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야 한다.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만 한다. 나는 프로야구 총재이기 때문이다. 60년 넘게 이어온 나의 야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허구연(KBO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