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은 저 멀리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팔렘방에서 먼저 터졌다. 전반 18분, 사우디아라비아 아메드 알 무사였다. 사우디가 바레인을 잡아준다면, 한국은 이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 시간, 자카르타 겔라노 붕 카르노 경기장 관중석에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가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사우디가 한 골 넣었다!” 핌 베어벡 감독 옆에 있던 통역 무전기로 이 소리가 새나왔다.
소리는 금세 묻혔다. 8만8000여 인도네시아 팬들의 함성은 고막을 찢는 듯했다. 1·2차전까지 수천명에 달하던 한국 교민 응원단은 수십명으로 뚝 줄었다. 현지 팬들한테 불상사를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탓이다.
전반 33분, 이천수(울산 현대)가 공을 밀어줬다. 상대 아크 오른쪽에서 터진 김정우(나고야)의 중거리슛이 수비수를 맞고 골망을 흔들었다. 둘은 방을 같이 쓰고 있다. 이천수는 “정우가 바레인전에서 백패스로 역전골을 내줘 마음 아파하기에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정우가 ‘꼭 에이 매치 첫 골을 넣겠다’고 하더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그래도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초조했다. 자칫 사우디와 바레인이 비긴다면, 한국은 이기더라도 짐을 싸야 한다. 전반 45분, 무전기에 다급한 목소리가 실렸다. “사우디가 또 골을 넣었다.”
18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2007 아시안컵 본선 D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최종 3차전. 조별리그 탈락 위기에 몰렸던 ‘핌 베어벡호’가 김정우의 1-0 결승골과 사우디의 바레인전 4-0 승리에 힘입어 천신만고 끝에 8강에 턱걸이했다.
한국이 8강에 갈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극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한국은 2000년 아시안컵에서도 이번과 똑같이 1무1패 뒤에 인도네시아를 잡고 8강 티켓을 얻었다. 한국은 조 2위(1승1무1패), 사우디(2승1무)가 조 1위가 됐다. 바레인(1승2패)과 개최국 인도네시아(1승2패)는 산소호흡기를 뗄 뻔했던 한국의 회생에 들러리가 됐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지휘봉을 놓을 위험에 놓였던 베어벡 감독은 코치진을 얼싸안았다. 그는 경기 뒤 “행복하다”고 했다.
최성국(성남 일화)-조재진(시미즈 에스 펄스)-이천수를 스리톱으로 내세운 한국은 제공권을 틀어잡으며 상대를 압도했다. 왼쪽 윙백 김치우(전남 드래곤즈)는 빠른 발로 상대 공을 먼저 걷어냈고, 오른쪽 윙백 오범석(포항 스틸러스)도 중앙수비 빈 공간을 메우며 상대 공격을 차단했다. 김상식(성남)도 중간에서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하며 수비진의 부담을 덜어줬다.
한국은 후반 28분 이천수의 단독슛이 크로스바를 넘기는 등 파상공세를 펼쳤으나, 상대 수문장 선방에 여러 차례 막혀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베어벡 감독은 초조한 듯 후반 40분 이동국(미들즈브러) 등 세 명을 교체 투입하며 시간을 끌었다.
대표팀은 19일 말레이시아로 이동해 22일 밤 8시20분 쿠알라룸푸르에서 C조 1위 이란과 8강전을 치른다. 한국이 2004년 아시안컵 8강에서 3-4로 졌던 이란에 설욕하고 4강에 오르면, 비교적 약체인 이라크-베트남 승자와 4강에서 만난다. 중국은 이날 우즈베키스탄에 0-3으로 져 C조 3위로 탈락했다. 자카르타/송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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