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의 고참 선수들에게 남아공 대회는 사실상 월드컵과 고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1998년 이후 12년 동안 월드컵을 기다려온 이동국(31·왼쪽)은 26일(현지시각) 포트엘리자베스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16강전 우루과이와의 경기 뒤 아쉬움을 머금은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경기장을 떠났다. 30대 중반이 된 이운재(37·가운데)와 안정환(34·오른쪽)은 각각 후배 정성룡과 차두리를 감싸안고 격려의 말을 건네고 있다. 포트엘리자베스/김진수 기자, 연합뉴스 jsk@hani.co.kr
12년 기다렸지만…단독기회 불발, 남아공 38분 아쉬움
이운재·안정환·김남일…2002년 ‘4강 신화’ 세대 굿바이
이운재·안정환·김남일…2002년 ‘4강 신화’ 세대 굿바이
월드컵은 그를 느닷없이 삼킨 깊숙한 ‘함정’ 같았다. 2002 한·일월드컵 직전까지 다다랐으나 ‘최종 23인’에 부름을 받지 못해 방황의 늪에 빠지더니, 누구도 그의 출전을 의심하지 않던 2006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경기 도중 혼자 방향을 틀다 무릎을 다쳐 독일에서 그라운드 대신 수술대에 올랐다.
26일(현지시각) 우루과이와의 월드컵 16강전. 후반 42분 우루과이 최종 수비진의 ‘오프사이드 함정’을 허물고 이동국(31·전북)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의 오른발에 박지성이 보낸 공이 달라붙었다. 상대 수문장과 일대일 기회. 10대였던 1998년에 월드컵 데뷔 무대를 밟은 그가 쌍둥이 아빠가 될 만큼 12년을 기다려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회택 전 대표팀 감독이 “한국 축구에서 가장 오른발 힘이 좋은 선수”라던 그의 발이었지만, 빗물을 머금은 공은 힘없이 굴러가 골라인을 넘지 못했다. ‘이동국 혹사 논란’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각급 연령대 대표팀에 불려다니며 한국 대표 스트라이커로 우뚝 섰지만, 유독 월드컵은 그에게 골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번 대회 직전 부상을 당했으나, 끝까지 재활을 포기하지 않으며 출전했던 그의 마음도 복잡한 듯했다. “12년간 월드컵을 기다려왔는데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결과가 아니다.” 12년을 기다려 이번 월드컵에서 38분을 뛴 그는 2014년 월드컵대표를 기약하기 어려운 나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상 이번 대회를 끝으로 월드컵과 이별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또 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을 이뤄낸 이운재(37·수원), 안정환(34·다롄 스더), 김남일(33·톰 톰스크), 이영표(33·알힐랄), 박지성(29·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이다.
지난해까지 대표팀 붙박이 수문장이었던 이운재는 이미 이번 대회에서 정성룡(25·성남)에게 주전 장갑을 물려줬다. 이번 대회 ‘특급 조커’로 활용이 예상됐던 안정환도 “이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자연스런 세대교체를 받아들이고 있다. 김정우와 기성용에게 자신의 텃밭과도 같았던 중원의 자리를 내준 김남일도 대표팀 은퇴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축구팬들로선 이영표와 박지성이 없는 브라질월드컵을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 할 것 같다. 이영표는 “부족하긴 했지만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역할은 최선을 다했다”며 “행복한 월드컵이었다”고 대회를 마친 소감을 밝혔다. “대표팀 은퇴 시기를 생각한다면 2011년 아시안컵 무대가 될 듯하다”고 했던 박지성도 16강전이 끝난 뒤 “나의 월드컵이 끝났다는 생각에 아쉽다”며 머지않아 주장 완장과 태극마크를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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