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선유(좌)가 22일 2006 토리노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서 중국의 왕멍(우), 캐나다의 캘리나 로버지(중앙)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AP=연합뉴스)
이제 4바퀴밖에 남지 않았다. 천사는 이대로 얼음판 위에 쓰러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순간, 죽을 힘을 다해 바깥쪽으로 치고 나갔다. 마침내 캐나다 선수를 제쳤고,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품에 안았다.
23일 새벽(한국시각) 이탈리아 토리노 팔라벨라 빙상장. 한국이 2006 토리노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내 이 종목 올림픽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은 또 이날까지 금4, 은3, 동1개로 역대 겨울올림픽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한편의 드라마가 펼쳐졌고, 드라마의 주인공은 지난 19일 여자 1500m 결승에서 석연찮은 실격 판정으로 동메달을 놓친 변천사(19·신목고)였다. 한국은 27바퀴를 도는 3000m 계주 결승에서 전다혜(23·한국체대)-진선유(18·광문고)-최은경(22·한국체대)-변천사 차례로 순서를 정했다.
스타트 라인에 선 전다혜가 총성과 함께 얼음판을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몇 걸음 못가 캐나다 선수에게 밀려 얼음판 위에 나뒹굴었다. 가슴 철렁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첫 코너링 반바퀴까지인 ‘아펙스 구간’이라서 재출발하는 행운을 얻었다. 위기를 넘긴 한국은 재출발에서 전다혜가 중국의 푸티안유에 이어 2위로 레이스를 펼쳤다. 20바퀴를 남기고 진선유가 캐나다 선수에게마저 추월당해 3위로 처졌다. 위기의 순간, 변천사가 나타났다. 변천사는 16바퀴를 남기고 중국과 캐나다 선수가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외곽으로 빠져 선두를 탈환했다.
이후 9바퀴 동안 순탄한 레이스를 펼치던 한국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7바퀴를 남기고 진선유가 캐나다 선수와 몸이 부닥치면서 중심을 잃어 중국에 이어 2위로 처진 것. 금메달이 물거품처럼 보이던 순간, 다시 변천사가 나섰다. 최은경한테서 바통을 이어받은 변천사는 4바퀴를 남기고 바깥쪽으로 치고나갔다. 변천사는 엄청난 스피드로 다시 선두를 탈환한 뒤 전다혜의 엉덩이를 힘껏 밀었다. 위기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주자 진선유는 1바퀴를 남기고 중국의 왕멍과 다시 부닥치는 아찔한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밀리지 않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꿋꿋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와 동시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졌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긴장과 초조는 계속됐다. 한동안 경기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것. 한국 응원단과 선수들이 초조하게 전광판을 바라보던 순간, 이번에는 더 큰 함성이 팔라벨라 빙상장을 흔들었다. 혹시 한국이 실격이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전광판 맨 위에는 ‘코리아’가 자랑스럽게 새겨졌다. 함성은 중국의 실격으로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 관중들이 내지른 것이었다. 중국은 3위로 골인했으나 왕멍이 캐나다 선수를 밀어 이탈리아에 동메달을 넘겨줬다. 이탈리아 쇼트트랙 사상 올림픽 첫 메달. 은메달은 캐나다에 돌아갔다.
1994년 릴레함메르 겨울올림픽부터 4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딴 쇼트트랙 여자 계주는, 한국 올림픽 역사상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5연패를 달성한 양궁 여자 단체전에 이어 두번째 대기록을 갖게 됐다. 한국은 이날 쇼트트랙에서 다시 금메달을 보탰지만, 나라별 종합순위에서는 전날과 같은 7위를 기록했다. 토리노/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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