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인 카르피아·러시아인 밴틀
필리핀에서 온 세사르 카르피아(60·왼쪽)와 러시아 출신 세르게이 밴틀(58·오른쪽)은 앞 가슴에 기념 배지를 주렁주렁 달고 다닌다. 카르피아는 끈에 매달았고, 밴틀은 천에 고정시킨 게 다를 뿐이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색깔도 다양하고, 하트 오각형 반달 등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둘은 친구 사이. 국적은 다르지만 나이가 비슷하고 무엇보다 취미가 같기 때문. 이들은 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간다. 각국 선수단과 언론사 등에서 만든 기념 배지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카르피아와 밴틀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배지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이번 올림픽에서 다시 만났다. 선수촌이나 메인미디어센터, 경기장 들머리에 나란히 서서 각국 선수단과 기자·관광객들을 향해 끊임없이 “핀을 바꾸자”고 외친다.
카르피아의 배지 수집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 시작됐다. 친구에게 우연히 선물받은 배지가 앙증맞고 예뻐, 이후 수집광이 됐다. 88서울올림픽 등 한국을 몇차례 다녀가기도 했다. 그는 “올해로 꼭 30년째 세계를 누비며 모은 배지가 6만4천개에 이른다”며 “꼭 갖고 싶은 배지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밴틀은 자기 나라에서 열린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부터 배지를 모았다. 무엇이든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학창시절 서랍 속에 굴러다니던 배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인 수집광이 됐다. 그는 “카르피아 등 세계의 배지 수집광들과 전자우편으로 정보를 교환한다”며 “한국 배지도 아름다운 게 많다”고 말했다.
배지 수집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들만은 아니다. 메인미디어센터와 경기장에는 자원봉사자와 검문검색을 맡은 군인들도 ‘피네, 피네’하며 손을 벌린다. ‘피네’는 핀의 이탈리아 말. 메인미디어센터의 일부 기자들도 배지 수집에 재미를 붙였다. 카자흐스탄의 한 기자는 기자석을 돌며 ‘배지를 바꾸자’고 기자들에게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가 모은 배지도 수십개에 이른다.
한국 선수단과 기자들은 이들에게 평창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용 배지를 나눠주며 ‘한국’과 ‘평창’을 알리고 있다. 누가 누가 배지를 많이 모아 본국으로 돌아갈지, 배지수집 장외올림픽이 흥미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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