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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관중 몰고 다닌 실력파 ‘얼짱’ 정미라

등록 2007-12-28 18:53수정 2007-12-28 23:38

현역시절 정미라 선수의 모습.
현역시절 정미라 선수의 모습.
숭의여중에서 농구 시작 당시 키 1m38…지독한 훈련으로 극복
1979년 장신팀 연파 세계선수권 준우승 주역…온 국민이 농구팬
[그때 그 선수 ⑤] 정미라

“서울 장충체육관에 몰려든 6천여 관중은 경기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정미라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파마 머리에 유니폼 차림으로 은퇴식에 참석한 그녀는 300여 팬들의 사인공세에 둘러싸여 다시 엉엉 울어버렸다.”

1981년 12월, 당시 일간신문들은 ‘깐돌이 정미라 농구코트 떠났다’는 등의 제목으로 그의 은퇴소식을 전했다. 정미라(53)씨는 1970~80년대 여자농구 인기의 중심에 있었다. 현역 시절 ‘탤런트 뺨치는 외모’ ‘코트의 욕심쟁이’ ‘토끼처럼 날렵하게 뛰는 예쁜 플레이’라는 표현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당시 방송인 이택림씨가 한 주간지에서 진행한 ‘스타와 데이트 코너’에 운동선수로는 드물게 초대될 정도였다. 그는 ‘누나부대’의 원조다. “중고생 팬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죠. 태릉선수촌에서 외박 나갈 때마다 팬레터를 한 상자씩 들고 나갔으니까요.”

서울 약수동에 살던 그는 농구명문 숭의여중에 ‘뺑뺑이’ 1회로 입학했다. 농구선수를 뽑는다는 방송을 듣고 무작정 지원했다. “7남매 중 막내였는데 몸이 약해 엄마가 밥 많이 먹으라고 농구를 권했어요.” 하지만 키 1m38, 몸무게 25㎏으로는 어림없었다. 운동장에 모인 50여명 가운데 두 번째로 작았다. 키 순서대로 가운데를 뚝 잘라 나머지는 집에 가라고 했다. 다음날 어머니가 통사정해 농구부에 들어갔다. “사실 외삼촌과 외사촌 오빠들이 농구선수였어요. 어머니가 ‘빽’을 썼는지 그 키로 어떻게 뽑혔더라구요.”

그는 농구에 흠뻑 빠졌다. “잠자리에 들면 농구공이 천장에 왔다갔다할 정도”였다. 하지만 늘 벤치신세였다. 중3 때부터 독하게 마음먹고 새벽마다 남산길을 달렸다. 9명 중 5명이 진학하는 숭의여고에 간신히 합류할 수 있었다. 키 작은 단점을 메우려고 슛거리를 멀리했다. “그땐 3점슛 제도가 없었던 게 아쉬웠다”고 했다. 탄력이 좋아 당시 여자선수는 어림없던 더블클러치(이중점프)도 구사했다. 고2 겨울방학 때 키도 1m68로 부쩍 자랐다. 고3 때부터 주전자리를 꿰찼고 실업팀 드래프트에서 농구명문 국민은행에 선발됐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국가대표에도 뽑혔다.

한국여자농구대표팀 정미라(오른쪽)가 1980년 9월21일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국을 101-68, 33점 차로 대파한 뒤 주장 강현숙(왼쪽)과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은 당시 정미라씨 팬이 만든 신문스크랩 자료)
한국여자농구대표팀 정미라(오른쪽)가 1980년 9월21일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중국을 101-68, 33점 차로 대파한 뒤 주장 강현숙(왼쪽)과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사진은 당시 정미라씨 팬이 만든 신문스크랩 자료)
그가 현역시절 가장 잊지 못하는 대회는 1979년 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세계여자선수권. 잠실체육관 준공기념으로 열린 이 대회는 연일 2만여 관중으로 열기를 뿜었다. 관중들 손에 든 팻말응원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한국은 미국을 94-82로 꺾었다. 하지만 캐나다와의 개막전 패배(63-76)가 끝내 발목을 잡았다. 골득실 차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한 신문은 “국민들은 마지막날까지 손가락으로 골득실을 헤아리며 가슴을 졸였다”고 전했다. 정미라는 개인득점 7위(경기당 14점)에 올랐고, 한국선수로는 유일하게 12명의 미인선수에도 뽑혔다. 대회가 끝난 뒤 청와대도 방문했다. 세계선수권 준우승으로 조성된 여자농구 인기는 엄청났다. 문화체육관이 비좁아 장충체육관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여자경기가 끝나면 관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그 다음 남자경기는 맥이 빠졌다”며 웃었다. 대표팀 주장이던 그가 1981년 12월, 결혼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하자 난리가 났다. 결혼 상대인 “‘미스터 김’이 누구냐”며 언론이 관심을 보였고, 첫 아이를 낳은 뒤에도 ‘스타 근황’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정씨는 결혼 뒤 15년간 공백을 깨고 1997년 여자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코트로 돌아왔다. 삼성생명 코치도 지냈고, 요즘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감독관으로 경기장을 자주 찾는다. 약간 살이 빠졌지만 생머리에 생글생글 웃는 모습은 30년 전 그대로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정미라씨는 최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감독관으로 활동중이다. 사진제공 WKBL.
정미라씨는 최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감독관으로 활동중이다. 사진제공 WKBL.
정미라는

△1956년 11월17일 경남 함양 출생

△서울 숭의여중·고(1969~74년)

△실업팀 국민은행(1975~81년)

△국가대표(1975~81년)

△제7회 아시아여자선수권 금메달(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아경기 금메달(1978년)

△제8회 세계여자선수권 은메달(1979년)

△제8회 아시아여자선수권 금메달(1980년)

△삼성생명 코치(2002~04년)

△〈문화방송〉 해설위원(2005~07년)

△여자농구연맹(WKBL) 경기감독관(현재)

△남편 김세원(53)씨와 아들 영중(23·중국 중의대), 딸 영선(22·이화여대 체육과)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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