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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 ‘나는 왜 ‘조선 대표’를 택했나’

등록 2010-06-16 14:07수정 2010-06-16 16:08

아버지 ‘한국’ 국적 이어 받아 북한 대표선수
왜 시대 흐름을 거슬러 ‘조선’ 선택한 것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대표팀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정대세는 재일동포입니다.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이어받았지만 북한의 대표선수로 뛰고 있습니다. 그는 왜 ‘한국’이 아니라 ‘조선’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는 왜 많은 재일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선택하고, 심지어는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기도 하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것일까요? 정대세가 2008년 7월 <한겨레> 매거진 ‘ESC’ 에 보내온 글을 소개합니다. 당시 정대세는 5개월에 걸친 월드컵 3차 예선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글은 6월22일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에서 득점 없이 비긴 소회로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한국’국적을 이어받은 나는 왜 조선 대표팀을 택했나 (2008/07/02)

안녕하세요. 장마로 기분이 찌뿌드드한 정대세입니다. 오늘도 일본에선 일찍부터 비가 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약 4주일간의 해외 원정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안기니 내 침대가 쾌적하군요. 몸 컨디션을 회복한 뒤 6월24일부터 가와사키 프론탈레 팀에 합류해 다시 연습에 매진하게 됩니다.

고3때 수학여행 간 평양에서 선언하다

이제 5개월에 걸친 3차 예선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6월22일 한국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한국과의 시합은 아쉽게도 득점 없이 비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관중석에서 통일기를 휘날리며 응원해 주신 분들도 있어 정말 감동했습니다. 경기장에 나와 주신 분, 텔레비전으로 시합을 봐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몹시 고대하던, 한국에서 한 시합이어서 반드시 골을 넣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만 실망스런 시합을 보여드리게 돼 죄송합니다.

지난달 14일의 대요르단전을 앞두고, 6월7일 요르단이 한국과 비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요르단과 시합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2 대 0으로 쌈빡하게 이겨(이날도 저는 골을 넣지 못했습니다만…) 최종예선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최종예선에 나갈 수 있게 돼 한시름 놨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함께 최종예선에 나가게 된 것도 정말 기쁜 일입니다. 수비에 치중한 팀 전술 때문에 생각처럼 공격을 할 순 없었지만 3차예선에서 유일하게 무실점을 기록하는 성과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최종예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려운 시합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상합니다. 제 희망을 말한다면, 꼭 한국, 일본과 같은 그룹에서 싸우고 싶습니다(6월27일 열린 아시아 최종예선 조 추첨에서 남과 북은 같은 조인 B조에 배정되었다-편집자)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이번 테마는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입니다. 도대체 나는 언제부터 조선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걸까. 초심으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 보겠습니다.

언젠가 전화로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데 무심코 “서랍을 정리하다가 대세의 소학교(초등학교) 때 작문이 나왔어. ‘나는 장래 반드시 국가대표가 될테야!!’라고 돼 있었어”라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J리그 다큐멘터리 등에서 곧잘 듣는, 흔해빠진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소학생 때부터 그런 꿈을 간직해온 모양입니다.

고교 3학년 때 여름, 수학여행으로 조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평양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축구부 친구들과 뭔가 얘기를 하던 나는 그만 들뜬 기분에 “나는 꼭 조국대표가 돼서 여기(평양)로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힘차게 선언한 일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한국’ 국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는 멋도 모르고 모두들 앞에서 내 꿈을 선언한 것입니다.

조선대학에 진학한 나는 망설임 없이 축구부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 2004년 아시안컵 예선 조선대표로 참가해보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날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막은 것은 저의 ‘국적’이었습니다. “나는 공부에선 다른 학생보다 뒤지지만 이제까지 총련계 민족교육을 받아서 애국심과 민족혼, 긍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내 국적 표기가 ‘한국’이라는 데 모순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조선’ 국적을 다시 취득해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당시 축구부 부장에게 말했습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시대를 거슬러…

지금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갈 때 비자 신청하기도 쉽고, 조선-일본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때에 일본에서 살아가기가 아무래도 용이합니다. 이런 시기에 국적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다는 것은 황당한 얘기로 들렸을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재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가 피난 가는 방향과는 거꾸로 재난 발생지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저 자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선’적을 취득하려 했으나 결과는 노(NO). 우리 가족은 어머니만이 ‘조선’적, 아버지와 누나와 형님은 ‘한국’적인데다, 일본과 국교가 있는 ‘한국’적에서 국교가 없어 일본이 ‘나라’(國)로 인정하지도 않는 ‘조선’적으로 바꾸는 것은 일본 법률상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눈앞에 다가온 꿈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감으로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눈물만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열망했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말다툼을 해 내 꿈 때문에 가족까지 깨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만큼 조선대표가 되고자 했던 내 꿈은 강렬했고 가족 또한 열렬히 응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2005년 2월9일 그런 나를 제쳐놓고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조선전이 열렸습니다. 같은 재일동포로서 조선대표로 소집된 안영학, 이한재 선수가 일본 매스컴에서 앞다퉈 모셔 가는 귀한 몸이 된 걸 선망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스타디움으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에겐 일본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시합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대표를 상대로 호각지세를 이루며 싸우는 조선대표 선수들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그리고 ‘국적’ 문제만 없었다면 나도 이 무대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정말 부럽기 짝이 없고 또한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는 분기가 치받쳐 올라왔습니다. 저는 꿈을 포기했습니다.

대학 졸업 뒤 프로로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입단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분기도 잊고 프로로 활동하는 데 몰두할 뿐 제대로 시합에도 나가지 않던 나에게 낭보가 전해졌습니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분들이 힘을 써서, 일본에서의 ‘국적’ 표기를 바꾸지 않고도, 내 꿈과 민족에 대한 생각을 평가해준 ‘우리나라’가 패스포트(여권)를 발행해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진정한 ‘조선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 일시 포기했던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기쁨보다 놀라움이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23년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때 일본에 건너온 할아버지가 생활 기반을 잡고 일본 정부의 부당한 차별 속에서 조선사람으로 살았고, 그 2세인 아버지 어머니가 그 뜻을 이어받아 우리를 ‘우리 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학교에서 대학까지의 16년간에 걸친 민족교육은 내게 조선사람 마음을 길러 주었습니다. 수업 커리큘럼이나 귀한 친구들을 사귀는 일은 일본 학교에 다녔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리 학교는 일본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우리나라 말, 역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의 혼과 긍지, 내가 일본에 있더라도 조선사람으로 살아갈 신념을 심어 주었습니다.

“7년만에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이런 나의 성장과 그 속에서 배양된 애국심, 민족심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조선대표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끌어 준 것도 아니고, 바로 이것이 ‘정대세가 조선대표를 택한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학교를 선택해 준 것에 감사합니다. 저를 조선인으로 키워 준 우리 학교에 감사합니다.

대표가 되고 나서 첫 시합은 지난해 7월 마카오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 일본에서 익힌 나의 우리말 실력이 대표선수들에게 통할까, 문제없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 보이겠다는 기대를 안고 꿈의 무대로 가는 첫발을 대디뎠습니다.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한 환경의 차이, 서포트 부족 등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마디의 불평불만도 없이 항상 전력을 기울여 플레이하는 대표선수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잊어버렸던 혼이 다시 되살아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내가 그냥 간단히 제이(J) 리그에 들어가고, 간단히 국가대표가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 학교의 절반 크기에도 못 미치는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시작해 주변의 서포트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계속 달려온 잡초혼 덩어리가 정대세다, 하고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8년 2월 충칭의 동아시아선수권, 월드컵 아시아예선을 조선대표와 함께 싸워왔습니다. 지금은 국가대표라는 자각도 다지면서 2010년의 남아프리카 대회를 향한 일념뿐입니다. 이 많은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 플레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인간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고교 3학년 여름, 친구들에게 선언했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외치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7년이나 걸렸지만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어!!”

정대세 조선 축구대표팀 선수 ·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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