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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외로운 투사들아, 우리끼리 농사짓고 놀며 위로하자

등록 2020-09-02 07:36수정 2020-09-02 07:37

옛 투사들의 쉼터 여주 얼쑤농장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민주화 일꾼들이 이제는 얼쑤농장에서 호박과 양파를 키우는 자연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일섭 대표, 윤기현 선생, 김수철 기능장.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젊음을 바쳤던 민주화 일꾼들이 이제는 얼쑤농장에서 호박과 양파를 키우는 자연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일섭 대표, 윤기현 선생, 김수철 기능장.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송촌리 파사산 기슭에 얼쑤농장이 있다. 게으른 농부들이 농장을 빙자해 놀이터를 만든 것일까. 밭일을 하다가 틈틈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막걸리로 더위를 식히며, 흥이 동하면 북과 장구 등 사물놀이를 하니 놀자판으로 볼 만도 하다.

얼쑤농장 회원들은 하나같이 민주화·노동·농민운동에 젊음을 불살랐던 투사들이다. 약자들의 인권이 내동댕이쳐진 현장을 지키며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이들이다. 반면 자신이나 가족은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칭송은커녕 ‘왜 그렇게 살았느냐’는 비아냥을 들을 때도 적지 않다. 심지어 ‘다른 부모는 돈 잘 벌어 재산도 물려주는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느냐’는 자식들의 말을 들을 때면 먼 산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투사들의 몸이 늙고 병들어가면서 마음에도 외로움이 가득해졌다.

지난 6월25일 단오축제 때 어울려 함께하는 얼쑤농장 회원들. 얼쑤농장 제공
지난 6월25일 단오축제 때 어울려 함께하는 얼쑤농장 회원들. 얼쑤농장 제공

얼쑤농장은 그런 외로움이 만들었다. 끼리끼리 어울려 “얼쑤~” 하며 추임새를 넣어 우리끼리라도 위로해보자며 만든 곳이다. 지난 3월 이 농장 쉼터가 열리자 몇개월 새 15명이 함께했다. 이 가운데 4명은 농막을 지어 아예 주소지까지 옮겼고, 몇명은 이 더위에도 한창 농막을 짓고 있다.

얼쑤농장의 모태는 여행협동조합(여협)이다. 여협은 10년 전 부천에서 노동운동을 한 김일섭(66) 얼쑤농장 대표가 시작해 지금은 회원이 300여명이나 된다. 1년에 30~40차례씩 모여 북한산 둘레길을 걷거나 방방곡곡 여행을 가고 뒤풀이를 하고, 소그룹이 모여 텃밭도 가꿨다.

얼쑤농장의 최연장자인 동화작가 윤기현(71)이 이곳에 오게 된 것도 3년 전 여협에 합류한 덕이다. 윤 작가는 <서울로 간 허수아비>가 100만권, <보리타작하는 날>이 40만권 팔린 밀리언셀러 작가로, 한때는 그의 동화가 교과서에 3개나 실렸다.

얼쑤농장 김일섭 대표(왼쪽)와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
얼쑤농장 김일섭 대표(왼쪽)와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말아라~’

가수 신형원이 부른 ‘개똥벌레’의 가사는 <서울로 간 허수아비>에 나오는 글을 따서 만들었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너무 가난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하고 중·고등학교에 간 친구들을 바라만 보며 한을 달랬던 ‘소년 윤기현’의 아픔이 개똥벌레 가사에서 전해진다. 소년은 배움의 욕구를 고물상에서 구해온 백과사전을 닳도록 읽으며 달랬다. 교과서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그가 보고 듣고 부딪친 것들이 아름다운 동화의 소재가 됐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고단한 삶이 참교육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1976년 아동문학가로 등단한 그는 1980년 광주 5·18 때는 시민군으로 전남도청을 지켰다. 그러다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한 새벽, 도청 앞 와이엠시에이(YMCA)에 있던 시민들을 피신시키라는 명을 받고 도청을 나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서울로 도망 와 주민교회 등에서 광주의 실상을 전했다. 그때 그의 증언을 들은 김종태 열사는 광주의 실상을 알려도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신촌에서 분신을 하고, 김의기 열사도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는 자신의 증언으로 젊은이들이 죽었다며 광주에 대해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6월25일 단오축제 때 풍물을 치며 노는 얼쑤농장 회원들. 얼쑤농장 제공
지난 6월25일 단오축제 때 풍물을 치며 노는 얼쑤농장 회원들. 얼쑤농장 제공

1990년대엔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2000년부터는 10년간 서울시민대학에서 동화 강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의 동화가 금서가 되고, 강의길도 막히자 전남 진도로 내려가 3년간 버섯 재배를 했다. 그때 다시 개똥벌레 같은 고립감에 외로움을 절절히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시절 동화를 지도받았던 이오덕 선생이 세운 충북 충주 이오덕학교로 옮겨 이오덕 선생의 일기를 정리하던 중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지난해 4월이었다. 천행으로 신약 임상시험에 응했다가 피실험자 중 유일하게 약효를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에서 99살로 장수 중인 어머니에게 옛 어른들이 쓰던 비방을 일일이 여쭈어 기록하고, 소년 시절 백과사전을 훑듯 자기 몸과 약을 공부했다. 이 비방에 따라 체온을 올리기 위해 새벽마다 뜨거운 물을 마시고, 화목난로를 가까이서 쬐었다. 또 폐를 살리려 유튜브에서 성악가들의 복식호흡법을 찾아 배우며 따라했다. 얼쑤농장은 그가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방법들을 배우려는 사람들까지 모여 어우러지는 장소다.

윤 작가와 김일섭 대표는 만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살아온 여정이 비슷해 곧 의기투합했다. 김 대표는 서울대 공대를 나왔다. 대학에 진학해선 ‘곤궁한 집을 도와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운동권을 멀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뒤 ‘광주 5·18’에 대해 듣고 분개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부천의 조그만 금속회사에 취직해 부천금속노조를 만들어 부천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얼쑤농장까지 함께하는 동갑내기 김수철 기능장을 만난 것도 부천 노동운동 현장이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부천시 시의원을 두번 역임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치보다는 이렇게 뜻 맞는 이들끼리 어울리는 게 좋았다. 그것이 여협으로 이어졌다. 얼쑤농장에 매주 두번씩 와서 텃밭농사를 짓다가 아예 상주하기로 한 두 여성도 원풍모방과 경동산업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이다.

얼쑤농장의 버섯을 재배하는 윤기현 선생(왼쪽)과 김일섭 대표.
얼쑤농장의 버섯을 재배하는 윤기현 선생(왼쪽)과 김일섭 대표.

얼쑤농장에선 버섯을 다섯채의 하우스에서 기르고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과 함께 막걸리 정도는 넉넉하게 마실 종잣돈을 마련하고, 회원들끼리 여행도 할 꿈을 실현시켜줄 버섯이다.

3천여평의 땅에 이미 들어선 대여섯채의 농막을 비롯해 열채의 농막이 지어지면, 인근에 제2의 얼쑤농장을 만들겠다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들 ‘운동가’ 가운데는 이혼 혹은 졸혼한 이들도 있고, 주말마다 처자식이 와서 함께 생활하는 집도 있다. 상주하는 이들뿐 아니라 텃밭형 주말농장으로 활용할 회원도 함께한다. 김일섭 대표는 “러시아에선 도시인들이 금요일이면 가족 단위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는 ‘다차’라는 주말농장이 있다”며 “외로운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짓고 놀며 살아갈 힘을 얻는 얼쑤농장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주/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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