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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어디가 남이고 어디가 북인가

등록 2013-12-16 19:10수정 2013-12-16 20:59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천하의 만고역적. 모반대역부도죄인. 오직 악행을 조장하며 아첨하는 사람들만을 높이고 신임했으며, 사치가 도를 넘고 형정이 문란하고 재정이 고갈돼 안팎이 무너짐에 이르니…. 대역부도의 죄를 시인하자 자신이 보는 자리에서 처형하고, 역모 가담자뿐 아니라 연좌돼 처벌을 받은 사람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이런 말들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지금 벌어지는 현실의 묘사인가. 조선시대 각종 사화와 당쟁, 반정과 역모 사건의 갈피마다 서려 있는 핏빛 어린 말들은 단순히 과거형에 머물지 않는다. 수백년의 세월에도 풍화되지 않고 살아남아 북한의 반문명적인 현실과 겹쳐 다가온다. 과거와 현실은 뒤섞이고 스며들어 하나를 이룬다.

그러면 이런 말들은 또 어떤가. 반역 행위,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의 패륜적 발언, 무지막지한 권력을 동원한 난도질, 국가 전복 음모…. 이는 북쪽에서만 들려오는 말인가. 안타깝게도 언론에 활자화된 남쪽 정치인과 권력자들의 발언이다. 상대편을 향한 증오와 경멸, 저주가 섞인 격한 언어들이 맹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난무한다. 그래서 지금 한반도는 과거와 현재, 남과 북이 서로 뒤엉키면서 어지러운 무늬를 그려내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주장은 과장이고 견강부회에 불과하다고. 북한이 왕조 시대와 흡사한 것은 맞지만 남과 북을 결코 동렬에 놓고 바라볼 수는 없다고 말이다. 정말 그런가.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 처형에서 확인된 동토 왕국 북한에 비하면 남한은 훈풍이 도는 따뜻한 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북한에 대한 ‘상대적 우위’로 자족해야 하는가.

북한은 장성택을 ‘천하의 만고역적’으로 규정하면서 ‘오만불손한 행동’을 집중 비난했다. 남한의 새누리당은 ‘대통령 사퇴 촉구’와 ‘아버지 전철’을 이야기한 민주당의 장하나·양승조 의원에 대해 “반역을 자행하고 있다”고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소신에 따라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한 것은 ‘불경죄’ 정도를 넘어 ‘역모죄’로 둔갑해버렸다. ‘최고 존엄’에 대한 ‘오만불손함’은 남과 북에서 똑같이 용납될 수 없는 중죄인 셈이다.

장성택의 사형 집행이 육체적 생명의 강제적 지움이라면 국회의원에 대한 의원직 제명은 정치적 살해행위다. 그리고 이런 살해행위 추진을 지켜보는 권력 주변 인사들의 반응 역시 대동소이하다. 장성택이 체포되는 순간에 포착된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 참석자들의 얼어붙은 표정과, 새누리당 국회의원 155명 전원이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장하나·양승조 의원의 의원직 제명에 동참한 데는 기본적인 유사성이 흐른다. 그것은 최고권력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비굴함이요,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몸조심이다. 국회의원 각자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개별 헌법기관이라는 원론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북한 김일성 일가의 세습 독재체제 유지의 핵심에 국가안전보위부가 있다면, 남한 ‘보수정권 세습’의 핵심에는 국가정보원이 있다. 한쪽이 유일체제 유지를 위해 장성택 숙청에 앞장섰다면 다른 한쪽은 보수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민주적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장성택 처형이라는 북한 상황을 빌미 삼아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정원의 무력화는 절대 있을 수 없다”며 조직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 남과 북의 권력자와 정보기관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형국이다.

남북의 적대적 공존(상생) 관계는 여기서 그칠 것 같지 않다. “괴뢰보수패당을 비롯한 온갖 적대세력들의 책동에 대한 무자비한 철추” “무모한 도발과 같은 돌발사태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 등의 말이 부닥치며 긴장의 파고는 점차 높아져만 간다. “정부와 국민의 일치단결”이라는 대통령의 말에서는 상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이를 내부 정치에 활용한 과거의 모습도 겹쳐져 다가온다.

북한의 야만성과 반문명성에 대한 손가락질은 물론 좋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내부 성찰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권력 작동의 기본적 유사성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안보정책이 아닐까. 그리고 ‘장성택 소멸’에서 다시금 확인된 권력의 덧없음에도 한번쯤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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