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간첩 혐의 증거조작 사건’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검찰 수사를 통해 하나둘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단서 삼는다면 누가 증거조작을 최종 결정하고 승인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검찰 수사팀이 국정원 대공수사국의 김아무개 과장 등을 기소하면서 낸 공소장 등을 보면, 국정원은 지난해 말 4차례에 걸쳐 중국 선양 총영사관의 국정원 출신 영사에게 전문을 보내 증거조작과 관련한 지시를 했다. 이런 암호 전문의 발송은 국정원 내부 규정상 대공수사단장 등 2급이 전결권자라고 한다. 4급인 김 과장이 독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단서도 있다. 공소장에는 국정원 협조자 김아무개씨가 문서 위조 비용을 요구하자 김 과장이 740만원을 지급한 것으로 나온다. 국정원에서 이 정도 돈을 지급하려면 2급 이상 간부의 결재를 거치도록 돼 있다고 한다.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고 철저한 결재를 요구하는 국정원에서 전문 발송이나 공작금 집행의 경위와 명목을 상급자가 모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부서가 관련된 일인 만큼,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윗선’이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재가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도 맞는다.
그렇잖아도 김 과장 등은 서울 내곡동 국정원 사무실에서 일과시간에 사무실 팩시밀리를 통해 위조문서를 선양 총영사관에 보내는 수법으로 가짜 증거를 만들어 법원에 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버젓하게 위법을 저질렀으니, 조직 차원에서 용인되고 추진된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증거조작은 1심 법원에서 간첩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뒤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대선개입 댓글 사건으로 국정원의 존립 근거가 의심받던 시점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한 국정원 지도부의 독려나 묵인이 있었으리라는 의심은 당연하다.
이 정도 단서와 정황이라면 김 과장의 상급자인 3급 대공수사처장 외에 2급인 대공수사단장과 1급인 대공수사국장도 수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차장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해서도 정치적 책임을 묻기에 앞서 실제 관여 여부를 조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팀은 과장이나 처장에게 증거조작의 책임을 묻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려는 기색이라고 한다. 범죄 혐의와 수사 대상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렇게 중도에 수사를 접는다면, 검찰은 스스로 특검의 재수사를 불렀다는 불명예를 또 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검찰 수사의 엄정함과 독립성을 믿는 사람도 줄어들 터이니, 검찰이 수사권과 독점적 기소권을 고수하기도 힘들어진다. 검찰이 명운을 걸고 나서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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