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
한 주를 여는 생각
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
이인우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
이인우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이 책을 읽으며 단박에 기시감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시감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탈북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증거조작이 사실로 확인된 지금, <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가 들춰내는 국가범죄는 현재진행형이다. 간첩조작 행위가 과거완료형이 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내 기억하고 복기하는 것이다. 함주명(83)씨가 이 책을 써달라고 의뢰한 이유다.
이 책을 특수하게 만드는 지점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만큼이나 기구한 함씨의 인생역정이다. 철없는 나이에 인민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왼쪽 눈을 잃었고, 남녘의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남파공작원이 되어 휴전선을 넘은 사연. 남파되자마자 자수하여 30년을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 52살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으로 조작된 고난의 운명. 16년의 감옥생활 끝에 재심을 청구해 ‘조작간첩 무죄 1호’가 된 불굴의 의지.
<조작간첩…>은 함씨의 일생과 고문, 재심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 함씨와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노력을 두루 담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실화를 제공한 부림사건의 담당검사였으나 끝내 사과를 거부해 지탄받았던 최병국 전 한나라당 의원이 함씨 사건의 담당검사였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함씨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 누구도 이런 (고문·조작) 범죄를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끔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하루빨리 남북이 극한적인 대결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의 시대로 접어들어 다시는 나와 같은 분단의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멀쩡한 국민을 간첩으로 만드는 나라, 어디 또 있나요
무고한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간첩 사건으로 만회하려 혈안이었다. 남파공작원 전력을 갖고 있는 함주명씨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간첩증거 조작이 탄로난 유우성씨 사건에 대해 함씨는 “유신체제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탄했다.
함주명(83)씨는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짙은 색 안경 너머로 검은 ‘의안’이 우물 같은 빛을 냈다. 지팡이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남긴 고문의 흔적이며, 의안은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다. 불행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화석 같은 존재, 함씨를 지난 3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개성상인 그는 유명한 개성상인 함정일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개성인삼상업조합장을 지낸 아버지는 개성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부자였다. 개성시 만월동 648번지, 80칸이 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았다. 식모와 침모, 남자하인 하나와 아버지 비서가 따로 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철없는 10대를 보내던 어느 날 잠자던 함씨를 어머니가 깨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당시만 해도 남한 땅이었던 개성 시내를, 국군이 아닌 인민군이 중무장한 채 남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6월25일 새벽이었다.
의용군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와 개성여고에서 영어와 교련을 가르치는 배석장교였던 큰형과, 육군 경리사관학교에 합격해 등교를 준비하던 작은형은 급히 몸을 숨겼지만,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함씨에겐 별 변화가 없는 나날이었다. 그의 인생에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한 것은 그해 여름방학이었던 8월의 어느 날이었다. 학교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인민군 장교가 단상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의용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소영웅 심리가 발동한 19살의 함씨는 별 고민 없이 손을 들어버렸다. 이념 같은 건 알지도 못할 때였다. 당시 그가 다니던 개성상업학교에서 100여명이 스스로 의용군이 됐다. 집에 들를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입대하느라 가족과 상의는 고사하고 작별인사도 할 수 없었다. 45㎜ 대전차 직사포 부대의 조준수가 된 그는 1950년 10월11일 오전 8시께 임진강 고랑포 부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미군 탱크 하나를 격파하고 다음 과녁을 살피던 중 고막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장탄수 병사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그의 왼쪽 눈에서 시커먼 액체가 쏟아졌다.
남파간첩 상이용사로 영예제대한 함씨는 김일성 대학에 특례입학할 수 있었다. 예쁜 여학생이 많은 연극반 활동에 재미를 붙였는데, 여기서 함씨의 운명을 가를 사건이 발생한다. 교내 행사에서 공연을 마친 뒤 뒤풀이를 하기로 했는데 비용이 모자랐다. 학생들은 각자 기숙사에서 사용하는 개인용 침대 매트리스 커버 한장씩을 팔아 모자란 비용을 충당하기로 했다. 학교당국은 허가 없이 공공물품을 반출했다며 조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함씨의 출신 성분이 드러났다. 함씨가 부르주아 출신이며, 가족들이 모두 남하했다는 사실. 학교의 권유에 따라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폐허로 변한 개성 집에 내려온 함씨는 전쟁 통에 어머니가 자신을 찾으러 집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친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갈 수 있는 방도를 찾던 그는 남파공작원에 자원한다.
개성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철없는 나이에 인민군 들어가서
한국전쟁 참전했다 왼쪽눈 잃고
출신성분 들통나 대학 쫓겨났다 어머니 만나려 남파 자청한 뒤
휴전선 넘자마자 자수해 살다
5공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모진 고문끝 간첩으로 조작됐다
16년만에 출소해 재심 청구하고
마침내 ‘무죄’ 판결 이끌어냈다
나 같은 사람 더 이상 없기를 밑바닥 생활 1954년 4월14일 휴전선을 넘자마자 자수한 그는 미군 첩보대를 거쳐 원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그를 ‘검거’했다고 상부에 보고했고, 수갑을 찬 채 각목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이른바 ‘통닭구이’와 고춧가루 물을 먹이는 등의 고문을 받았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려던 그는 간첩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했으나, 육군 방첩부대에 근무하던 작은형과 인척의 도움으로 북한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만 인정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남파간첩이었다는 사실과 보안법 전과자라는 꼬리표는 평범하게 살려던 그의 인생을 줄기차게 방해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만하면 이력이 들통나는 바람에 고물상을 비롯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근안 쉰둘의 가장이었던 함씨는 1983년 2월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됐다. 당시 계급이 경위였던 이근안은 자기가 고안했다는 전기고문 기계와 물고문으로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했다. “이근안은 손두께가 다른 사람 두배만 했어요. 특히 가슴을 주로 때렸는데 숨을 못 쉴 지경이었어요. 어깨를 때리면 금세 팅팅 부었는데, 거길 볼펜으로 찌르면 자지러질 듯이 아파요. 천하장사도 못 배깁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은 칠성판에 눕혀놓고 “아래서는 전기고문을 하고, 위로는 물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양쪽 새끼발가락에 전기를 연결해 놓고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운 뒤 샤워기를 트는 것이다. 함씨는 요즘도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이 깨곤 한다. 비몽사몽간에 떠오르는 장면은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답답해하다 갑자기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이다. 서울대생 박종철을 죽인 바로 그 순간이다. 재심무죄 1호 간첩으로 조작된 함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16년을 보낸 뒤 1998년 68살이 되어서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16년 내내 결백을 주장하던 함씨는 출옥 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남규선 간사와 강금실·조용환 등 인권변호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재심 판결을 이끌어냈고 무죄를 확인했다. 함씨의 승리 이후 숱한 조작간첩 사건의 재심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함씨는 “유우성씨 사건을 보면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기춘씨가 누굽니까.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 아닙니까. 다시 유신체제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멀쩡한 국민을 간첩으로 만드는 나라가 어디 또 있단 말입니까”라고 한탄했다. <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 출판기념회는 23일 저녁 6시30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조작간첩 재심 승리 1호 함주명씨가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6층에서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의용군에 입대했던 함씨는 미군이 쏜 포탄의 파편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철없는 나이에 인민군 들어가서
한국전쟁 참전했다 왼쪽눈 잃고
출신성분 들통나 대학 쫓겨났다 어머니 만나려 남파 자청한 뒤
휴전선 넘자마자 자수해 살다
5공시절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모진 고문끝 간첩으로 조작됐다
16년만에 출소해 재심 청구하고
마침내 ‘무죄’ 판결 이끌어냈다
나 같은 사람 더 이상 없기를 밑바닥 생활 1954년 4월14일 휴전선을 넘자마자 자수한 그는 미군 첩보대를 거쳐 원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그를 ‘검거’했다고 상부에 보고했고, 수갑을 찬 채 각목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이른바 ‘통닭구이’와 고춧가루 물을 먹이는 등의 고문을 받았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려던 그는 간첩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처했으나, 육군 방첩부대에 근무하던 작은형과 인척의 도움으로 북한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만 인정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남파간첩이었다는 사실과 보안법 전과자라는 꼬리표는 평범하게 살려던 그의 인생을 줄기차게 방해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만하면 이력이 들통나는 바람에 고물상을 비롯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근안 쉰둘의 가장이었던 함씨는 1983년 2월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법 연행됐다. 당시 계급이 경위였던 이근안은 자기가 고안했다는 전기고문 기계와 물고문으로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했다. “이근안은 손두께가 다른 사람 두배만 했어요. 특히 가슴을 주로 때렸는데 숨을 못 쉴 지경이었어요. 어깨를 때리면 금세 팅팅 부었는데, 거길 볼펜으로 찌르면 자지러질 듯이 아파요. 천하장사도 못 배깁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은 칠성판에 눕혀놓고 “아래서는 전기고문을 하고, 위로는 물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양쪽 새끼발가락에 전기를 연결해 놓고 얼굴에 수건을 덮어씌운 뒤 샤워기를 트는 것이다. 함씨는 요즘도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잠이 깨곤 한다. 비몽사몽간에 떠오르는 장면은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답답해하다 갑자기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이다. 서울대생 박종철을 죽인 바로 그 순간이다. 재심무죄 1호 간첩으로 조작된 함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16년을 보낸 뒤 1998년 68살이 되어서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16년 내내 결백을 주장하던 함씨는 출옥 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남규선 간사와 강금실·조용환 등 인권변호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재심 판결을 이끌어냈고 무죄를 확인했다. 함씨의 승리 이후 숱한 조작간첩 사건의 재심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함씨는 “유우성씨 사건을 보면서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기춘씨가 누굽니까.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 아닙니까. 다시 유신체제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멀쩡한 국민을 간첩으로 만드는 나라가 어디 또 있단 말입니까”라고 한탄했다. <조작간첩 함주명의 나는 고발한다> 출판기념회는 23일 저녁 6시30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대강당에서 열린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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