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여러 직업을 겪었지만, 체질적으로 조직생활을 버거워하는 편이다. 나 같은 개인주의자들이 집단주의로 점철된 사회에서 생존하는 방식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운영하는 단체가 영세해서기도 하지만, 혼자 그럭저럭 일하는 데 적응하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단짝 친구가 생겼다. 이 고양이 친구와 잘 지내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개인주의자 고양이도 외롭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 개개인의 삶의 질이 보장될 때 성취될 수 있다. 동물의 복지 역시 마찬가지다. 고양이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고양이를 나와 같이 존엄한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랑을 감정으로만 해석하지만 사랑은 관계의 문제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애정이라는 욕구는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배워야 한다. 상대방에 대해 모르면 오해만 늘어난다. 누구나 동물학대가 나쁘다고 말하고 누구나 개는 인간의 친구라고 말하지만 매년 8만마리의 유기동물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실제로 개에 대해 모른다. 게다가 고양이는 전통적으로 편견도 강했다. 어릴 적 할머니는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불렀다.
상자 속에 들어가 사색을 즐기기 좋아하는 철학자 니체.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 고양이들이 외로움을 잘 견딘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에 의존해 사는 동물들은 모두 외로움을 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개와 고양이가 다른 점은 개는 자신의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고양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자 고양이라고 해서 외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개인주의자들을 오해하는 지점과 같다. 개인주의자들은 사회적 소통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고등동물이다. 그것은 고양이에게 다양한 욕구가 있고 사회적 소통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니체는 친구에게 어떻게 말을 걸까? 니체는 언제 행복할까? 니체는 무엇을 원할까?
늬들이 고양이 욕구를 알아?
니체가 야옹야옹 울 때는 무언가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다. 의자에 앉아 작업하고 있을 때 발밑에서 우는 것은 일하지 말고 놀아달라는 의미다. 그래도 작업을 계속하면 곧 무릎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다. 작업이 길어져 니체를 안아 바닥으로 내려놓으면(다리가 저리므로) 그때는 책상 위로 올라온다. 자판 위에 자리를 잡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니체는 지속적으로 보채지 않지만 언제나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온몸으로. “나랑 놀자고! 집사야!”
잠시 쉴 때 니체와 하는 놀이는 쥐돌이 놀이다. 아, 물론 언제 놀이를 하느냐는 내가 아니라 니체가 정한다. 싫으면 절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냥 본능이 있는 고양이들은 이 욕구를 풀어줘야 한다. 쥐돌이, 낚시 놀이 장난감 중 니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반짝이 잠자리 장난감이다. 쥐돌이 놀이 장난감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고양이들도 나름 자기 취향이 있다는 사실!
동물이 무료함을 느끼지 않고 본능에 맞게 살도록 다양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풍부화’라고 한다. 풍부화는 동물원에 사는 동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려묘에게도 필요하다. 고양이들이 주로 집착하는 풍부화 도구에는 캣타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끈 종류, 비닐, 상자 등이 그것이다. 고양이들은 정말 싼 물건만으로도 행복해한다. 얼마나 효자 동물인가!
니체가 가장 행복해할 때는 택배가 한꺼번에 올 때이다. 상자를 여러 개 놓아두면 온종일 여기 들어갔다 저기 들어갔다. 정신없이 혼자 논다. 우리 인간도 커피숍 갔다 음식점 갔다 영화관 갔다 다양한 공간을 즐기지 않나. 왜 놀이 욕구는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인 고양이들이여
싫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지독하게 말 안 듣는 고양이들이여
그대들이 잃을 것은 없다
무엇을 하던
캔과 간식과 장난감을 대령하는
인간은 당신의 집사일 뿐이다.
글·사진·그림 전채은 동물을위한행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