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겨울이 왔다. 영하로 내려가던 날, 나는 에밀리를 위해 비닐을 주문했다. 계단과 현관 사이 공간에 비닐을 막아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겨울 동안 밤에라도 에밀리를 집안으로 들일까 고민도 해보았다. 자주 만나면서 얼굴을 익히면 서로 친해지겠지.
그런데 판이 뒤집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니체가 밖으로 뛰어나간 것이다. 밖으로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는 니체였다. 우다다 뛰어나가 계단 아래까지 갔고 에밀리는 줄행랑을 쳤다. 처음으로 시도한 바깥 나들이가 경쟁자 아 내기라니. 니체는 두려움에 계단에 납작 엎드렸다.
에밀리는 지금도 늘 내가 밖으로 나가면 그제서야 자기도 집 밖으로 나와 밥을 먹는다. 물 그릇이 자주 얼기 때문에 때마다 뜨거운 물을 부어 주어야 한다. 에밀리는 이제 내가 손을 뻗으면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다리에 몸을 부비고 만져달라고 앵앵댄다. 만져주면 ‘골골골송’ 이쁘게 내는 에밀리. 우리는 이제 진짜 친구가 되었다.
에밀리는 낮에는 자주 집을 비운다. 어딜 그렇게 마실을 다니는 것일까. 어느 골목에서 사람들을 구경할 것이고 친구도 만날 것이다. 에밀리같은 길고양이에게 겨울은 혹독한 시련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있다. 집고양이인 니체에게 겨울은 그냥저냥 어느 계절과 다르지 않은 일상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허락된 영역은 작은 집안 밖에 없다. 어떤 것이 더 행복일까.
다행히 에밀리가 사는 동네 골목은 너무 좁아 차가 다니지 못한다. 길고양이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는 교통사고, 전염병, 고양이들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싸움, 굶주림, 추위다. 에밀리의 코에는 작은 상처가 있다. 언젠가 외출하려고 나오는데 에밀리가 아내려왔다. 대문 밖에서 가방 안에 있는 간식을 주니 에밀리는 먹는 동안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했다. 길 생활 동안 생긴 습관일 것이다. 다른 고양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먹이를 챙겨야 했던 날들.
그런데 비닐을 주문한 지 일주일이 넘었데도 배송되지 않았다. 무슨 배달 사고라도 났나? 택배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송장 번호를 입력하고 택배 직원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몇번의 시도 끝에 통화해 일주일이 넘도록 비닐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자 직원은 요즘 물량이 너무 밀려서 미안하다며 주말 안에는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왜 빨리 배달 안해주냐는.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한국 사람들은 물량이 많거나 사고가 나서 배달이 늦어지는 것을 대부분 참지 못한다. 무엇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가 있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택배 회사 직원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그 실수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도 아닌데 기다려주면 안될까.
길에서 오래 살아 간식을 하나 먹어도 주위를 경계하는 길고양이 에밀리(왼쪽), 에밀리와의 동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집고양이 니체.
짜증이 난다고, 화가 난다고, 주문한 것이 늦게 나왔다고 내는 손님의 화풀이를 받는 일은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26살 젊은 노동자가 혼자 위험한 작업을 하다 사망했다. 2인 1조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2013년 호랑이 사육사가 죽었을 때도, 2014년 사자 사육사가 죽었을 때도, 2018년 퓨마가 탈출했을 때도 2인 1조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동물원 사육사 따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으니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 안정적인 급여나 대우는 주어지지 않는다. 햄버거 가게 직원 따위 고급 인력도 아니니 손님이란 완장을 차고 막말을 하고 물건을 던져도 그만인 사회. 배달 하는 일 따위, 따위, 따위….
이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는 햄버거 매장에서 계산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배달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기계를 돌려야 한다. 살면서 나이가 어리다고 학벌이 별로라고 갑질 한번 안 당해본 사람 없을 것이다. 그것이 부당했다고 느꼈다면 우리 자신은 사회에서 어떤 자리에 있던 누군가에게 갑질을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왜 다들 자신이 위로 올라가면 갑질의 주체가 되는 것일까.
동네에 떡볶이집이 신장개업을 했다. 먹으려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십 분 뒤 두 명의 앳된 청년들이 들어왔다. 아직 가게가 수입이 많지 않아 직원을 채용할 수 없어 배달과 음식조리 등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괜찮았다. 청년들이 모두 노량진으로 몰려가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찾아 노력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다린다. 에밀리에게 가장 행복한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을 매일 생각하고 매일 결정한다. 그리고 비닐이 배달되어 오기를 천천히 기다린다. 연말 배달 물량이 밀려 힘들게 일하고 있는 택배 회사 직원은 배달을 하고 노동을 해서 받는 급여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을 것이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간혹 불편을 참아야 할 때가 많다. 우리 모두는 ‘밥벌이’를 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함께 ‘파이팅’하고 싶다. 혹독한 겨울, 쉬지 않고 힘겹게 일하는 노동자들과 길고양이 모두.
글·그림·사진 전채은 동물을위한행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