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거미의 ‘외부 고막’ 구실…몸 크기 1만배 접시 안테나로 포식자·먹이 미리 감지 ‘다리 감각모로 듣는다’ 기존 이론 뒤집혀…고성능 보청기, 휴대폰 응용 기대
거미줄 앉은 골목왕거미. 거미줄은 몸 크기의 1만배인 외부 고막 구실을 해 멀리서도 소리를 진동 형태로 듣는 것으로 밝혀졌다. 준펑 라이 제공.
거미는 먹이가 걸려 거미줄을 흔들리면 다리 끝 감각모로 진동을 감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귀가 없어 다리로 기계적 진동을 ‘듣는다’는 얘기다. 이런 통설이 허물어지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거미는 거미줄을 ‘외부 고막’처럼 이용해 거미줄에 닿기 전 멀리서 다가오는 먹이나 포식자를 예민하게 감지한다는 것이다.
지앤 저우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박사후연구원 등은 31일 미 국립학술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이용해 소리를 감지하는 ‘청각 아웃소싱’을 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자들은 무음·무진동 방에서 골목왕거미가 네모 틀에 거미줄을 치도록 하고 다양한 실험을 했다. 먼저 거미줄에 닿지 않아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3m 떨어진 곳에서 여러 높이의 소리를 들려주고 거미의 반응을 살폈다.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대한 거미의 다양한 반응 영상
놀랍게도 거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68㏈ 이상의 소리에 반응했다. 거미줄에 닿지 않아도 소리를 듣는다는 얘기다. 소리가 클수록 반응도 다양했다. 소리를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들려주었더니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혹시 거미 몸 안에 숨겨진 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연구자들은 이를 알아보기 위해 특수한 실험을 했다. 미니 스피커를 거미줄 중앙의 거미로부터 5㎝ 떨어지고 거미줄로부터는 2㎜ 거리에 두고 작은 소리를 냈다.
소리는 공기를 통해서는 감쇄돼 거미까지 전달되지 않았지만 거미줄을 통해서는 거의 약해지지 않고 전달됐다. 연구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거미가 거미줄을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구에 가장 먼저 등장한 육상동물의 하나인 거미는 거미줄을 외부 청각 기관으로 활용하는 놀라운 능력을 진화시켰다. 픽사베이 제공.
연구에 참여한 론 호이 미국 코넬대 교수는 “거미줄은 너무 가늘기 때문에 사실상 공중에 둥둥 떠 있다 소리가 들리면 근처 공기 분자들에 떠밀릴 뿐”이라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사람은 음압이 고막을 진동시키면 소리를 느끼지만 거미줄은 그런 압력이 아니라 나노 크기의 공기 입자가 내는 움직임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성긴 바퀴처럼 생겼지만 거미줄은 고도로 예민한 소리 안테나 구실을 해, 소리가 일으키는 공기 입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고막보다 뛰어난 효율로 전달한다”고 논문에 적었다.
연구자들은 “거미줄은 거미의 몸보다 1만 배나 큰 고막이자 접시 안테나 구실을 한다”고 밝혔다. 전파망원경이 접시 안테나의 그물망으로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관측하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자들은 또 “거미가 몸을 뻗거나 움츠리는 식으로 자세를 바꿔 거미줄의 장력을 바꿔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범위를 조절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골목왕거미는 암컷의 몸길이가 10∼14㎜인 대형 거미로 유럽, 북미, 동아시아 등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에서 발견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이번 연구는 거미의 청각 시스템 진화를 새롭게 살펴볼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리에 털이 많은 다른 왕거미도 이런 식으로 듣는지, 거미줄을 치지 않는 늑대거미는 어떻게 듣는지 등이 후속 연구과제로 떠오른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가 소리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새로운 차원의 보청기와 휴대폰 마이크 등을 개발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인용 논문: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DOI: 10.1073/pnas.2122789119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