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되기 전 12시간을 굶은 돼지들 일부는 물을 받아먹었지만 대부분은 기진맥진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돼지들의 이빨은 썩어 없어졌거나 발치를 당한 상태였다.
‘비질’은 알감자를 삶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도살장에 실려 온 돼지들에게 물과 감자를 건넬 기회가 있다고 했다. 도축을 앞둔 농장동물들은 12시간 이상 굶주린다. ‘죽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을 소와 돼지들에게 깨끗한 물과 음식을 먹여주고,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일이 비질(Vigil)이라고 활동가들은 설명했다.
매일 전국 5만여 마리의 돼지가 도살장으로 들어가 ‘고기’가 된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는 돼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해 ‘서울애니멀세이브’ 활동가들과 6월10일 경기 화성시 한 도축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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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줄기 따라 ‘탈출’ 하고 싶은 돼지
오전 9시30분, 도살장 앞은 이미 트럭으로 번잡스러웠다. 소를 실은 트럭은 도축장 안으로 바로 들어가는 반면, 돼지를 태운 트럭들은 서너 대가 입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형트럭의 뒤 칸에는 50~80여 마리 돼지들이 타고 있었다.
기온 30도가 넘는 초여름 더위에 수십여 마리 돼지가 살을 맞대고 있는 탓에, 트럭 뒤 칸은 다가서기만 해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7~8톤 트럭 짐칸을 2층으로 개조해 위아래로 돼지를 태운 차량도 눈에 띄었다.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해온 감자나 수박 등을 돼지들에게 건넸다. 도축되기 전 축산동물들은 12시간 이상 굶주린다.
돼지들은 악을 쓰고 있었다. 동물의 비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 소리는 울부짖음이 분명했다. 사람이 다가가자 돼지들은 눈을 껌벅였다.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겉모습은 처참했다. 입가에 토사물을 묻힌 돼지, 각종 염증으로 붉게 변한 눈과 종양을 그대로 달고 있는 돼지, 상처 난 피부 위에 까맣게 오물이 말라붙은 돼지까지. 물 한 모금을 얻기 위해 칸막이 밖으로 코를 내밀고,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돼지가 있지만 이미 상당수의 돼지는 그저 트럭 바닥에 몸을 눕히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대부분의 돼지들은 이미 기진맥진해 트럭 바닥에 누워있었다.
트럭 2층의 돼지들은 물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창살로 다가왔다.
이날 비질 참가자는 모두 10명이었다. 참가자들은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각기 준비해온 물과 음식을 트럭 안 돼지들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입가에 물을 부어주자 돼지는 입을 달싹이며 창살로 다가왔다. 트럭이 비좁은 탓에 가장자리로 올 수 있는 돼지는 그나마 몇 마리 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간 감자를 꺼내 코 근처로 가져갔다. 식욕이 없는지 금방 받아먹지 않았다.
늘어선 서너 대의 트럭 안 돼지들에게 차례로 감자를 내밀어 봤다. 유난히 잘 먹는 녀석이 나타났다. 그 옆으로 한 마리가 더 나타나 서로 먹겠다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감자 잡은 손이 물릴까 봐 겁도 났지만, 자세히 보니 돼지들은 이빨이 거의 없었다. 이미 썩어 없어졌거나 발치돼 있었다.
2층으로 개조된 트럭 안 돼지들은 유난히 갈급한지 서너 마리가 창살에 매달렸다. 특히, 물을 받아 마시다 철창 밖으로 발을 빼내 나오려 하는 한 돼지의 모습은 참가자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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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살아있던 돼지가 정육 코너에
도살장에 들어서기 전 트럭이 대기하는 시간은 대략 10분. 돼지를 태운 트럭이 다시 나오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텅 빈 트럭이 도살장을 빠져나올 때마다 새로운 트럭이 도착해 다시 줄을 섰다.
서울애니멀세이브 은영 활동가는 “이른 새벽부터 전국 각지에서 돼지들이 도착한다. 도착하는 순서대로 도축이 이뤄지기 때문에 길게 줄을 서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하루 도축되는 돼지는 약 2천여 마리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도축은 끊임없이 이뤄진다.
도축장 앞에서 10여분을 대기하던 트럭은 사라진지 30분만에 빈 트럭으로 다시 나타났다.
낮 12시, 차량 10여 대가 도살장 안으로 사라진 뒤 다음 비질이 시작됐다. 도살장 바로 옆에 있는 축산물 직거래시장을 방문할 차례였다. 이 시장은 당일 도축된 동물들을 정육해 도소매 상인, 소비자들에게 파는 곳이다. 새벽부터 도축된 동물들은 11시부터 이곳에서 판매를 시작한다. 건물 2층에는 노량진수산시장처럼 고기를 사서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되어 있었다.
시장 비질에 앞서 활동가는 몇 가지 유의사항을 전달했다. 은영 활동가는 “동물을 해체해서 판매하는 곳이기 때문에, 피나 붉은 살, 비계를 보는 것이 불편한 분들은 함께 하지 않으셔도 된다. 우리는 도살장 한 곳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또 다른 현실을 목격하고 기록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최대한 관찰의 시선을 유지하며,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도 예의를 갖춰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층에서 물을 받아먹던 한 돼지는 창살 밖으로 발을 빼내 탈출하려고 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사진 촬영은 불가능했다. 시장은 흔히 재래시장 정육 코너를 한 장소에 몰아놓은 것 같은 공간이었다. 다만, 평소 정육점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동물의 내장이나 머리 등이 그대로 진열된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시장 바닥은 해체된 동물에서 배어 나온 기름과 핏물로 미끄러웠다. 10여 명의 참가자가 조용히 복도를 따라 상점들을 지나자 일부 상인은 보란 듯이 통로로 물을 뿌렸다. 대체로 참가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한 상인은 “다 불쌍하지”라고 낮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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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맞닥뜨린 ‘진실의 증인 되기’
활동가들은 비질을 ‘진실의 증인되기’라고 표현했다. 서울애니멀세이브는 비질을 “현재 육식주의 사회가 가리고자 하는 것을 도축장에서 목격, 기록하고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여 동물이 맞닥뜨린 폭력적 현실의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가축으로 태어나 짧은 생을 살고, 고기가 되는 축산동물의 삶을 일반 시민에게 환기시키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는 설명이다.
지난 10일 경기 화성시 한 도축장 앞에 실려온 돼지들. ‘비질’은 도축을 앞둔 축산동물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하며 이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활동을 말한다.
비질은 캐나다 동물권단체 ‘토론토 피그세이브’(Tronto Pig Save)에서 시작됐다. 토론토 피그 세이브를 설립한 아니타 크라이츠(Anita Krajnc)는 어느 날 산책을 하다 도로 위에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이 밀려있는 것을 보고, 당장 이들의 고통을 줄여주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다.
그는 오랜 시간을 달려와 굶주렸을 돼지들에게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후 돼지뿐 아니라 소, 닭 등 다른 농장동물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집회로 확장되면서 비질이 확산됐다. 현재는 영국·미국·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비질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 가운데는 뒤칸을 개조해 2층으로 돼지를 실어오기도 했다.
이날 비질은 참가자들의 ‘마음 나누기’로 마무리됐다. 도축장 앞 공원에 둘러앉은 참가자들은 처음엔 입을 떼기 힘들어했지만, 말문이 트이자 각자 느낀 많은 감상을 털어놨다. 대화는 1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이날 처음 비질에 참가했다는 대학생 이은결씨는 “오늘 비로소 돼지가 하나의 구체적 생명으로 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찜통 같은 차 안에서도 돼지들은 다 달랐다. 한 모금이라도 물을 더 마시려고 하는 돼지가 있는가 하면, 마치 양보하듯 기다리던 돼지도 있었다. 비건을 하고 있었지만 돼지는 그동안 하나의 생물종이었는데 이들도 모두 개성을 갖춘 생명체란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