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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야생동물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왈라비의 하룻밤

등록 2017-12-27 10:09수정 2017-12-27 19:05

[애니멀피플] 긴수염 동물기
태즈메이니아 오지 야영장
멀리 태즈메이나아데블이 울고
초대받지 않는 남의 집 들어온
나는 손님처럼 밤을 보냈다

태즈메이니아 북동쪽 끝 마운트 윌리엄 국립공원에 닿았을 때였다. 야영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왈라비들이 통통 튀어나왔고, 그중 세 마리가 그림처럼 서서 나를 지켜보았다. 동그란 여섯 개의 눈과 가만히 눈인사를 했다. 뒤에 있는 덤불에서도 시선이 느껴졌다. 어느 작은 섬에 닿았을 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나를 내려다보던 그 느낌이었다. 정지화면처럼 멈췄던 그들이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왈라비 세 마리가 튀어나와 나를 지켜보았다.
왈라비 세 마리가 튀어나와 나를 지켜보았다.
야영장은 인간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야영장은 인간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무로 된 테이블과 장작을 때울 수 있는 동그란 통 그리고 화장실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야영장. 오지 중의 오지인 데다 추운 날씨가 지속되어 오래전에 머물렀던 인간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풀을 뜯던 왈라비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초대받지 않은 남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기분.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하룻밤 묵어도 될까요?’ 왈라비들은 이내 하던 일을 했고, 나도 조심조심 자리를 잡았다.

해변에는 왈라비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쥐와 토끼처럼 생긴 작은 동물들이 덤불 사이로 잽싸게 내달렸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왈라비처럼 두 앞발을 모으고 뒷발을 모아 통통 튀어 다녔더니 녀석들이 벌떡 일어나 쳐다본다. ‘앗! 놀라게 해서 미안’ 내가 이 구역의 불청객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발바닥에 가시가 박혀 뒹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왈라비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풀을 뜯는다. 아프고 민망한 가운데 웃음이 나왔다. 진상 손님이 된 기분. 그들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해변에는 왈라비 발자국이 가득했다.
해변에는 왈라비 발자국이 가득했다.
나를 바라보는 왈라비.
나를 바라보는 왈라비.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왈라비들이 점점 내 주변으로 와서 풀을 뜯었다. 채식 라면을 끓였더니 한 마리가 킁킁대며 다가온다. 인간의 먹이를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쫓아내기도 뭣해서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눈으로 힘주어 말했다. ‘너는 너의 먹이를 먹으렴. 나는 나의 먹이를 먹겠다’ 그러자 녀석이 돌아가서 풀을 뜯는다. 와인 한 병 하고 잠을 청했는데 멀리서 태즈메이니아데블(태즈메이니아에 사는 육식성 유대류)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훨씬 작지만, 육식동물인 그의 포효에 소름이 끼쳤고, 왈라비들도 불안하겠구나 싶었다.

다음날 아침, 또 다시 다가온 왈라비.
다음날 아침, 또 다시 다가온 왈라비.
다음 날 아침, 수프를 끓이는데 이번에는 두 마리가 점점 다가왔다.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먹을 걸 준 건 아닐까. 인간에게 경계심이 없는 게 과연 괜찮은 걸까. 문득 서호주 어느 체험동물원에 갇혀 관람객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페팅을 당하던 왈라비들이 떠올랐다. 이어서 한국에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야생동물 카페에 갇혀있을 왈라비들도 떠올랐다. 야생에서 비교적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고 있는 왈라비와 하루를 보내니 자본주의에 착취당하고 있는 동물들의 처지가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단순히 생존을 넘어 인간의 쾌락을 위해 어떤 동물이든 마구잡이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 납치되어 감금되고 생산되어 소비되고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버려진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생명은 없는데. 악순환을 끊지 않으면 언젠간 이 왈라비들도 잡혀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야영장을 나서며 인사했다. ‘하룻밤 허락해줘서 고마워. 잘 지내렴. 나는 야생동물 카페를 막을게. 다시는 잡혀가지 않도록…’ 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왈라비들은 그저 우물거리며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글·영상·사진 긴수염 지구별 인간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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