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긴수염 동물기-가리왕산 다람쥐로부터
“청설모가 목숨 걸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것처럼 보였어
고향은 사라지고 갈 곳은 없고…눈물이 앞을 가리네”
2월24일 평창겨울올리픽 스노보드 여자 평행 대회전 경기에서 한 선수가 내려오는 도중 청설모가 등장했다. 다행히 치이지는 않았다. 유튜브 갈무리
안녕. 나는 가리왕산 중봉 출신 다람쥐야. 풍요롭고 아름다운 원시림이 나의 고향이지. 가끔 담비나 맹금류 같은 천적에게 쫓기는 것 외에는 별 걱정이 없었어. 가을이 되면 두 발로 걷는 생명체들이 몰려와 도토리를 마구 쓸어가는 바람에 겨우내 먹을거리 걱정을 해야 했지만 말이야. 그건 다음에 벌어질 사건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더라고.
어느 날부터 생전 처음 듣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 윙- 윙- 오래된 나무가 차례대로 쓰러졌고 난 너무 무서워 도망갈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내 작은 몸으로는 아무리 멀리 이동해도 가리왕산 전체를 쿵- 쿵- 울리는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 겨울잠을 자려면 준비해야 하는데. 하릴없이 두려움을 안고 황무지를 돌아다녔어. 쓰러진 나무 사이사이에 먹을 것이 있었지. 한때 내가 오르내리던 나무였는데 누워있는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두 발로 걷는 이들은 온갖 괴물을 동원해 끊임없이 나무를 베어내더라. 바위도 부수고, 동물도 치어죽이고, 그곳에 있던 모든 것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버렸어. 단 3일의 경기를 위해 500년 된 원시림이 사라져버린 거야. 믿기지 않는 현실에 결국 고향을 떠나고 말았어. 사실 난 지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어. 내 영혼이 2015년 추석 연휴, 가리왕산 폐허를 홀로 돌아다니던 인간의 손을 빌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너무 억울해서 하소연하고 싶었거든.
얼마 전에 그곳에서 올림픽이 열렸다지? 나뿐만이 아닐 거야. 평생 살던 터전을 빼앗기고 내몰린 원주민들, 임금이 체불된 건설노동자들, 그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곳이 집이었던 야생동물들, 그리고 무참히 잘려나간 원시림의 나무들… 올림픽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올림픽 난민들이지. 과연 올림픽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약자를 짓밟고 몰아내고 착취하여 끝내 성사된 올림픽은 과연 누구의 배를 채워주었을까. 너무 궁금하지 않니?
지난 2014년 가리왕산에서 평창겨울올림픽을 위해 활강경기장을 건설하고 있는 모습. 정선/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연히 평창에서 열린 스노보드 경기 도중에 청설모가 로드킬로 죽을 뻔한 장면을 목격했어. 다행히 서로 피해서 둘 다 다치지 않았지만, 너무나 아찔한 순간이었지. 우리는 그곳에 살고 있었고,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고, 내 눈에는 청설모가 시위하려 목숨 걸고 경기장에 난입한 것처럼 보였어. 마치 어떤 사람이 국가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마치 전쟁과도 같은 올림픽을 반대하며 ‘PEACE’를 몸에 붙이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것처럼 말이야. 올림픽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많은 사람이 이번 평창올림픽이 평화의 축제였다고 하지만 그게 과연 평화였을까.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영위하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때 진정한 평화는 올 수 있는 것 아닐까. 기득권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누구에게 강요되는가. 너만 사라지면 된다고, 너만 조용히 하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다고, 당신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설 때마다 사람들은 쾌감을 느낀다고, 당신들의 피땀 눈물을 갈아 넣으면 거룩한 올림픽이 완성된다고, 그렇게 세상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를 몰아세우는 그곳에 평화는 없었다. 지구별 생명체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는 없는 걸까. 그러니 올림픽,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원시림,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 눈물이 앞을 가리네. 하소연 들어줘서 고마워. 난 이만 지구별을 떠난다. 안녕.
(필자가 2015년 추석 연휴, 가리왕산 폐허에서 만난 다람쥐의 관점으로 작성했습니다)
긴수염 지구별 인간생명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