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공개 유작 <옥중화>, 1969, 한지에 수묵담채, 52×37㎝.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응노미술관 제공
고암 이응노(1904~89) 선생이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으면서 그린 옥중화 80점 등 미공개 작품 500점이 시민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죽음을 이긴 예술혼’이 담긴 미공개 걸작들이 무더기로 공개돼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간첩누명’ 옥중서 그린 작품 눈길
1950년대부터 만년작까지 망라
역대 전시 중 최대 대부분 ‘수작’
부인 박인경씨 “그의 눈물같은 작품”
대전 서구 만년동 이응노미술관은 25일 ‘신소장품전’을 열어 1950년대에서 1988년 만년작까지 회화, 조각, 판화, 판화 원판 등 고암의 미공개 작품 500점과 유품 등 697점을 공개했다. 고암의 부인 박인경(90)씨와 유족 서승완(77)씨, 지인 아를레트 브렌이 미술관에 2012~13년 기증한 작품 등을 모은 전시다. 박씨는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고암의 작품 1209점을 기증했다.
6월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가 역대 이응노 관련 전시 가운데 최대 규모이고, 프랑스로 간 60년대 초 도불기, 67~69년 옥중 생활 시기, 70년대 등 고암의 중요 시기별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미공개 걸작들이 한자리에 공개됐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는 반응이 나온다. 1전시관에 옥중화, 2전시관은 동물화·풍경화·구성작품, 3전시관에는 프랑스로 가기 전 50년대의 서화 작품, 4전시관에는 판화 및 판화 원판을 전시하고 있다.
고암이 겪은 삶의 고난과 예술혼을 엿볼 수 있는 1전시관이 단연 눈길을 끈다. 동백림 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1968~69년 그린 옥중화들이다. 고암은 67년 윤이상 선생 등과 함께 검거돼 서대문·대전·안양 교도소에서 2년 반 동안 수감됐다.
옥중화는 문자 추상과 문자에 군무를 섞은 듯 보이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화풍이 활달하고 채색도 들어 있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는 “고암은 덫에 걸려 억울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으로 승화시켰다. 고통의 삶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예술의 성을 우뚝 세웠다”고 평가했다.
박인경씨는 옥중화를 두고 ‘고암의 눈물’이라고 했다. “옥중화는 다른 작품과 달리 퍼짐이 있어요. 퍼짐이 눈물 같아서 가슴이 뭉클해져요.” 박씨는 “(옥살이를 한 데 대해) 생전에 슬프다는 말씀은 한번도 안 하셨지만 ‘그림을 못 그렸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때 얻은 게 많았다’고 하셨다. 죽음을 이기려고 그림을 했으니 슬프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번 전시회를 ‘윤회’라고 했다. 옥중화들엔 대전교도소와 연도가 적혀 있다. 대전에서 그린 작품이 대전으로 돌아왔으니, 사람이 고향을 찾아간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고암의 고향은 충남 홍성인데, 미술관 등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작품들을 보낼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김문정 이응노미술관 학예사는 “동백림 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옥중 생활을 할 당시 작업한 미공개 작품들은 기존에 보지 못했던 뛰어난 수작들이 많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의 회화의 토대가 된 서예 작품들도 한자리에 모여 고암의 작품세계를 훨씬 넓고 깊게 조망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대전/송인걸 기자, 노형석 기자 igsong@hani.co.kr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유학생·지식인 등 국내외 인사 203명이 독일 동베를린에서 북한 지령에 따른 간첩 행위에 연루됐다고 발표하고, 66명을 검찰에 송치하며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이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불법연행과 가혹행위를 사과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1950년대부터 만년작까지 망라
역대 전시 중 최대 대부분 ‘수작’
부인 박인경씨 “그의 눈물같은 작품”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고 있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공개 유작들. 1977년에 그린 <군무> 연작(한지에 수묵담채). 이응노미술관 제공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되고 있는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공개 유작들. 1977년에 그린 <군무> 연작(한지에 수묵담채). 이응노미술관 제공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유학생·지식인 등 국내외 인사 203명이 독일 동베를린에서 북한 지령에 따른 간첩 행위에 연루됐다고 발표하고, 66명을 검찰에 송치하며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사건이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불법연행과 가혹행위를 사과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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