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2공원에서 바라본 울산왜성과 주변 전경. 왼쪽으로 태화강과 동천 합류지점은 물론 멀리 울산만까지 보인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울산발전연구원 제공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⑬ 울산왜성
2013년 12월 울산시가 울산박물관에서 전시중이던 그림 한점을 사겠다고 예산 25억원을 편성했으나, 시의회의 예산안 삭감으로 무산된 일이 있다. ‘도산전투도’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임진왜란 막바지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도산성)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장면을 일본 관점에서 그린 병풍 그림이다.
가로 3.75m, 세로 1.73m 크기 6폭짜리 병풍 3개에 그려진 그림의 첫 장면은 울산왜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공격하는 조·명군과 성 안에 갇힌 채 식량과 물이 바닥나 말을 잡고 오줌을 받아마시며 악착스레 버티는 왜군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어 성 밖에서 태화강을 끼고 왜군 구원병력과 조·명군이 대치하는 장면,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조·명군 뒤를 왜군 구원병력이 쫓으며 공격하는 장면이 잇따라 펼쳐진다.
이 그림 원본은 정유재란 때 왜군 제4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울산왜성 전투 때 구원병력을 이끌었던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뒤에 사가(佐賀) 번주가 돼 구술한 것을 바탕으로 그의 가신이자 종군 화가인 오키(大木)가 그렸는데 1847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됐다. 울산시가 사려던 그림은 에도시대(1603~1867) 때 전해지던 모사본 3종 가운데 하나를 1886년 다시 모사한 것으로, 일본 유물 수집가 사카모토 고로(板本五郞)가 소장하고 있었다.
울산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울산왜성 전투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희귀 유물”이라며 구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인이 그들의 관점에서 그린 임진왜란 전투 그림 모사본을 거액의 시민혈세를 들여 구입할 가치가 있냐”는 반대 여론에 끝내 밀렸다. 그림을 사려기에 앞서 그림의 실제 현장인 울산왜성의 보존과 관리,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시민 홍보에는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부터 되새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 ‘독 안의 쥐’ 보고도 못잡다
“여러 적 중에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가장 강하니 청정을 격파한다면 나머지 적은 셀 것도 못 되오이다.”
임진왜란 6년째 정유재란이 터지던 해인 1597년 음력 섣달 그믐날 조선 국왕 선조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최고지휘관인 군문 형개를 만나 조·명군의 울산전투 승전 상황을 축하하면서 “곧 가토를 사로잡게 됐다”는 형개의 말에 고무돼 이렇게 답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설 쇠고 9일째 되는 날 선조는 이미 닷새 전 조·명군이 왜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했다는 ‘허무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이 울산전투는 조·명군이 왜란 끝무렵인 1598년 9월 육군 3로군에 수군까지 합해 ‘사로병진’ 작전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등 3곳의 왜군 본거지에 총공세를 펴기 9달 전 먼저 울산을 전략적인 공격목표로 삼아 집중공격함으로써 벌어졌다. 1597년 12월23일 새벽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명군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 등 5만여명의 연합군과 울산왜성 일대 왜군 1만여명 사이에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에 출동한 6만여 왜군 구원병력까지 치면 조·명·일 3국의 12만 대군이 12일에 걸쳐 벌인 왜란 기간 최대 규모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는 도원수 권율이, 명군 및 연합군 총지휘는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맡았다. 왜군은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했다.
1597년 9월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정유재란 이후 왜군의 승기를 꺾은 명과 조선은 다시 동남해안으로 쫓겨 수세에 몰린 왜군에 대한 막바지 총공세를 준비하면서 울산을 전략적인 우선 공격목표로 잡았다. 왜군의 핵심 배후거점인 경상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군은 한성 방어와 전라도 쪽 왜군을 견제할 기본 병력만 남기고 대부분 병력을 울산 공격에 집중했다. 비록 명의 군문 형개가 만류해 실행하진 못했지만, 국왕 선조까지 원정군을 따라 충주·제천까지 친히 행차해 원정군을 독려하고 군량 지원 등 상황을 직접 챙기려 했을 만큼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전투였다.
조·명군은 먼저 12월22일 언양과 태화강 하류 등 울산 외곽의 수륙 양쪽 길목부터 봉쇄한 뒤 23일 새벽부터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가토를 비롯한 성 안의 왜군 1만여명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이듬해 1월4일까지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부었다. 가토는 애초 울산왜성에서 남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자신의 본거지 서생포왜성에 있다가 조·명군의 울산왜성 공격에 관한 보고를 받고 23일 밤 조·명군을 피해 뱃길로 태화강 하류에서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수적 열세에 물과 식량까지 바닥난 왜군은 갈증과 허기에다 한겨울 추위마저 겹쳐 극한 상황 속에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왜군, 조·명 연합군 남하공세 대응해
가토 설계로 전투직전 40일간 공사
실록 “내성 험고하고 격파 어려워…”
공사 쫓겨 천수각·우물 못지어 눈길 하지만 조·명군은 끝내 울산왜성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조·명군이 목책과 흙으로 쌓은 왜성 외곽부는 그대로 치고 들어갔으나 돌로 쌓은 내성은 “험고하고 격파하기 어려워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군들이 마른풀과 섶을 지고 성 밑까지 진격해 적의 진영을 불태우는 화공까지 몇차례 시도했으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적의 탄환 때문에 사상자만 수없이 낸 채 실패로 끝났다. <연려실기술>과 <선조실록>엔 이 전투로 인한 명군과 조선군 전사자가 각각 1400여명과 1000여명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물어>에는 명군 전사자가 1만5000명을 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크나, 조·명군 전사자가 몇천명에서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명군은 주로 후퇴 과정에, 조선군은 주로 울산·경주 병사들이 화공에 동원됐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됐다. 성 안의 왜군도 구원병력이 도착했을 때 십중팔구가 빈사상태로 확인됐다고 한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천수각과 우물이 없는 왜성
울산왜성은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울산만과 연결되는 태화강과 동천 하류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왜란 초부터 울산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의 남하공세에 대응해 동쪽 최전선에 전초 방어요새로 쌓은 것이다.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다 가쓰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여일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가까이 있던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 성벽을 헐어 그 돌을 가져다 썼다.
울산 중구 동·서·남외동 일대에 걸쳐 있는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1894년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영성으로, 현재 북문 터를 중심으로 동·서문 터까지 양쪽으로 성벽이 복원돼 남아 있다. 울산 중구 북정·교동 일대에 있던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쌓은 울산군수(종4품) 치소가 있던 읍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뒤 성곽이 없어졌다.
울산왜성은 공사를 급히 한데다 축성이 끝나자마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본곽 안에 여느 왜성에 다 있는 지휘소 건물인 천수각이 없었다. 건물이라면 각 성벽 모서리마다 세운 12개의 전투용 누각과 거주용 막사 정도였다.
당시 이 왜성의 축성을 지켜본 왜군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일기에 “오른쪽도 왼쪽도 성을 쌓느라 쇠망치소리 도끼질 소리로 잠을 이룰수 없다. 총을 쥔 사람, 깃발 든 사람, 뱃사람 할 것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오고 어슬렁거리는 자는 매를 맞고 때로는 적에게 목이 잘리우고…”라고 급박했던 축성상황을 기록했다. 그는 또 당시 왜군 진영에 있던 조선인 포로 인신매매상에 관한 기록도 다음과 같이 일기에 남겼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 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어서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모습이 지옥의 사자가 죄인을 잡들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무서운 자들은 배가 정박한 부두에서 내부 깊숙한 진영까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가득 지게 하여 끌고 와서 도착하면 쓸모없는 소는 필요없다며 곧바로 죽이고는….”
울산왜성은 평야 한가운데 솟은 해발 50m의 독립된 구릉 꼭대기에 본곽을 조성하고, 본곽 북쪽 아래에 2곽, 그 서북쪽 아래에 3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갖췄다. 세 곽의 성벽 길이를 합하면 1300여m, 높이는 10~15m이다. 왜란 당시 구릉 남쪽 끝이 태화강과 접해 있어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및 퇴각의 편의를 위한 선착장(선입지)도 있었다.
또 본곽에서 선착장으로 연결된 동쪽 주출입구 남쪽 성벽을 2단으로 쌓고 다시 남쪽 성벽에서 선착장까지 능선을 따라 경사지면서 길다랗게 방어벽을 쳤다. 태화강과 접한 남쪽을 빼고 세 성곽의 동·북·서쪽 3면 외곽에는 2400m 길이의 흙둑(토루)과 해자를 두르고 다시 3중으로 목책을 세워 외성을 구축했으나 지금은 주택과 도로가 들어서 모두 없어졌다. 이 가운데 동쪽 성벽에서 지금의 중앙여고 자리까지 나팔 모양의 길다란 토루가 있어 주민들로부터 ‘나팔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1984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사라졌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문헌기록과 일제강점기 때 측량도면을 참고하면 왜성에서 서쪽으로 3㎞ 떨어진 태화루 부근과 북쪽 맞은편 학성산, 동천 구릉 등에도 언양과 경주 쪽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지성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왜란 기간 최대규모 울산전투 치러
조·명·일 3국 12만 대군 12일간 격돌
전사자만 1만명 내고 끝내 함락 못해
명군 후퇴중 인근 백성에 수탈 극심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는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통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은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 구실을 하고 있으나 주변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성벽 등을 빼곤 아래쪽 2곽과 3곽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한 교수는 “성 아랫부분 석축은 일찌감치 조선시대부터 뽑혀나갔을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경상좌병영성을 보수할 때 왜성 돌을 가져다 썼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돌이 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병영성으로 돌아가기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왜성 주소 : 울산 중구 학성동 100(학성공원3길 54) 일대
-울산왜성 주변 관광지 : 외솔기념관 및 생가, 경상좌병영성, 울산동헌 및 내아, 성안옛길 등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
학성산 충의사 안 전시관에 있는 울산왜성 전투 장면을 형상화 한 모형. 충의사는 2000년 7월 울산왜성 전투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에 세운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곳엔 임진왜란 관련 전시관도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가토 설계로 전투직전 40일간 공사
실록 “내성 험고하고 격파 어려워…”
공사 쫓겨 천수각·우물 못지어 눈길 하지만 조·명군은 끝내 울산왜성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조·명군이 목책과 흙으로 쌓은 왜성 외곽부는 그대로 치고 들어갔으나 돌로 쌓은 내성은 “험고하고 격파하기 어려워 포위한 상태로 주둔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선군들이 마른풀과 섶을 지고 성 밑까지 진격해 적의 진영을 불태우는 화공까지 몇차례 시도했으나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적의 탄환 때문에 사상자만 수없이 낸 채 실패로 끝났다. <연려실기술>과 <선조실록>엔 이 전투로 인한 명군과 조선군 전사자가 각각 1400여명과 1000여명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물어>에는 명군 전사자가 1만5000명을 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크나, 조·명군 전사자가 몇천명에서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명군은 주로 후퇴 과정에, 조선군은 주로 울산·경주 병사들이 화공에 동원됐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됐다. 성 안의 왜군도 구원병력이 도착했을 때 십중팔구가 빈사상태로 확인됐다고 한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울산왜성 본곽의 모서리쪽 성벽.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울산왜성 본곽 동쪽 성벽.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조·명·일 3국 12만 대군 12일간 격돌
전사자만 1만명 내고 끝내 함락 못해
명군 후퇴중 인근 백성에 수탈 극심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는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통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은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울산왜성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2단 성벽. 본곽 주출입구 주변으로 성벽의 석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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