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사진 모음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⑮ 시리즈를 마치며
1592년 4월 16만여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7년 동안 전쟁을 벌이며 울산에서 전남 순천까지 한반도 동남해안에 31개 성을 쌓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이다.
왜군이 쌓았다고 왜성으로 불리는 이 성들은 16세기 이후 한·일간 축성 교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된다. 수직으로 성벽을 쌓던 조선은 전쟁 뒤 성벽 각도를 왜성처럼 비스듬하게 바꾸었고, 성벽 모서리 부분도 돌의 길고 짧은 면을 엇갈리게 쌓아올렸다. 본성 바깥에 외성을 둘러 방어력도 높였다. 방어전략도 읍성 중심 수비체제에서 산성 중심으로 전환했다.
일본도 전쟁 뒤 조선의 성처럼 성벽에 치와 같은 돌출 구조물을 만들고, 성벽 위에서 밑으로 화살을 쏠 수 있는 수비시설을 도입했다. 성 근처에 행정관청도 설치해 지역 거점으로 삼았다. 장수 및 전투원 보호 목적의 왜성에 조선의 성처럼 행정치소 기능이 더해진 것이다.
이와 함께 왜성은 16세기 말 한·일·중 동북아 3국이 벌인 국제전쟁의 실체적 증거이자 사료라는 점에서 구제적으로 관련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왜성이 외면당하고 있다. 치욕적인 역사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한겨레>는 31개 모든 왜성을 현장취재하고 관련 유적과 자료를 종합해 지난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지면과 인터넷(hani.co.kr)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기사를 연재했다. 모두 14차례 기사를 연재한 뒤, 취재팀은 “왜성은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한 우리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준 전리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전쟁 초기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조선 수군의 해상봉쇄, 의병의 육상 보급로 차단,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겨 남해안까지 후퇴한 뒤 15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을 쌓았다. 왜군이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성에 의지해 조·명 연합군의 공격 등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11일 <한겨레> 왜성 기획취재팀 신동명·최상원·김영동 기자는 기획취재를 마치며 그동안 취재에 동행하고 도움말을 줬던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과 21세기 현재 왜성의 의미와 가치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방담을 나눴다.
21세기 현재 왜성의 의미는?
신동명(이하 신) 왜성은 일본의 조선 침략 전초기지라기 보다는 왜군이 조선·명나라군에 밀려 후퇴하던 수세 국면에 쌓은 성이다. 왜군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수륙 양쪽으로의 보급로 차단에다 조·명 연합군의 대대적인 압박공세에 쫓겨 왜성을 쌓고 버틸만큼 버티다 물러갔다. 왜군이 남긴 ‘전리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최상원(이하 최) 임진왜란의 전리품인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덧씌워져 왜성에 대한 거부감도 함께 커진 듯하다. 왜성은 왜군이 축성했지만, 우리 땅에 있는 유적이다. 우리 조상들의 피눈물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일·중 3국의 국제전쟁 산물이기도 하다. 왜성 재조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
나동욱(이하 나) 왜성은 16세기 말 한·일·중 3국의 역사적 유산으로 볼 수 있다. 당시 3국의 정황을 가늠할 수 있는 실체적 유산인 것이다. 이 전쟁 뒤 명나라는 청나라한테 대륙의 패권을 내줬고, 일본의 막부도 바뀌었다. 왜성은 왜군이 생존을 위해 만든 성이고, 일본으로 달아나면서 남긴 유적이다. 이번 답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김영동(이하 김) 왜성 연구는 일본 학계에서 처음 시작됐다. 그들이 식민지 점령 역사를 연구하면서 파생된 연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조상들의 한이 서린 곳으로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교훈이 담긴 역사 흔적이라고 본다.
지금에 와서 왜성의 활용방안은?
김 대부분의 왜성은 강이나 바다 근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모두 경치가 매우 좋은 곳에 있다. 왜성 터를 역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이 좋을 듯하다. 산책을 하면서 임진왜란과 왜성에 얽힌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곳으로 활용해야 한다.
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은 세계 여러 도시들이 침략자들이 남긴 건축물이나 문화 등에 대한 처리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굴욕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사례도 많다. 한·일·중 3국이 치른 전쟁의 흔적인 왜성을 역사유적공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고 있는 일본한테는 400여년 전 침략의 현장을 되새겨 보는 교훈의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왜성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유적이다. 당시 왜군은 100여년 동안의 내전을 겪으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갖췄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은 왜군을 결국 패퇴시켰다. 왜성이 분명한 증거물이다. 왜성을 정비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왜성 보전과 활용 방안에 대한 정부와 각 지자체의 논의가 필요하다.
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 고구려 유적을 중국 역사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 중국에서 볼 때 고구려한테 패배한 역사현장이 많은데, ‘최후 승자’라는 처지에서 모두 자신의 역사 속에 품으려 한다. 왜성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최후 승자인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유적이란 관점에서 활용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 옛 성과 왜성을 연계시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찾고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왜성 재발견 시리즈를 마친 소감은?
신 4개월 동안 10차례의 왜성 현장 답사취재 과정에서 4차례나 비가 와 힘들었다. 비에 젖어 질퍽거리는 산길을 헤매야 했고, 낫으로 우거진 풀숲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다녀야 했다. 힘든 취재 과정이었지만, 왜성이라는 색다른 역사유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많은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김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왜성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교과서에서 (왜성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성의 구조, 입지조건, 방어시설 등이 궁금했다. 현장 답사취재를 하면서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숨겨진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마사왜성 취재 때 비가 왔는데, 50~60도 가량 기울어진 산비탈에서 아래에 있는 낙동강 쪽으로 4~5m가량 미끌어지기도 했다. 아찔했던 순간이다.
나 왜성은 우리 전통 성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의 성이다. 또 왜성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실체적 흔적으로 조선의 역사와 임진왜란 전쟁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왜성에 관심이 없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또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왜성의 흔적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한겨레>가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왜성을 재조명해 의미가 크다.
최 무사히 기획을 마칠 수 있어 기쁘다. 비를 맞으며 산길을 헤매기도 했고, 해가 저물어 캄캄한 산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산에서 산짐승을 만났을 땐 정말 아찔했다.
31개 왜성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신 경남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안골왜성이다. 성벽 모서리 아랫부분에 돌이 하나 빠졌는데도, 성벽이 허물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400여년 전에 쌓은 석축 구조물이 중간에 돌 하나 빠져도 끄덕없이 버텨오고 있는 사실에 놀랍고 인상 깊었다.
김 부산 동래왜성이다.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부분의 왜성과는 달리 통치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또 왜군이 동래왜성을 쌓을 때 동래읍성의 돌을 뽑아다 쓰고, 왜란이 끝난 뒤 조선이 동래읍성을 복원할 때 다시 동래왜성의 돌을 가져다 썼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나 울산의 서생포왜성이다. 석축도 가장 잘 남아 있고, 사명당과 왜장이 강화회담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사람들한테 가보기를 권유하고 싶은 왜성이다.
최 경남 사천왜성이 기억에 남는다. 경남 사천시가 사천왜성 복원을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다. 복원할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를 하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시리즈를 마치며 아쉬움과 과제는?
나 왜성의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다. 각 지자체의 무관심·무지 등으로 관리소홀이 심각하다. 경남 양산의 호포왜성처럼 개발 때문에 왜성이 훼손되는 경우는 없어야 할 것이다. 현 상태 그대로라도 보전하는 것이 시급한 숙제다.
최 왜성에 대해 더 폭넓고, 더 깊이 있는 내용을 전달하지 못해 아쉽다. 기획과 관련한 많은 공부를 하면서, 학창시절 국정교과서로 배운 임진왜란 역사가 정말 얄팍한 지식이었다고 느꼈다. 다음 세대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웠으면 한다.
신 관리소홀, 엉터리 복원 등 왜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는 지자체의 태도도 아쉬웠다. 문화재청, 각 지자체의 담당 공무원도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김 쉽고 재미있는 왜성 기사를 쓰지 못해 아쉽다. 특히 왜성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라는 점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에 관한 학계의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나 우리 고고학계의 왜성 연구 수준은 현재 기초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학계가 새로운 관점에서 왜성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정리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시리즈를 마치며, 대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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