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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왜군, 조·명 연합군 남하에 쫓겨가 주둔…전남서 유일한 왜성

등록 2015-12-09 16:53수정 2015-12-16 16:44

하늘에서 내려다본 순천왜성 본성. 왼쪽 볼록하게 솟아오른 부분이 천수각이 서있던 천수대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바다에 접해 있었으나, 현재는 율촌산업단지 건설로 주변 바다가 매립된 상태이다.    최상원 기자
하늘에서 내려다본 순천왜성 본성. 왼쪽 볼록하게 솟아오른 부분이 천수각이 서있던 천수대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바다에 접해 있었으나, 현재는 율촌산업단지 건설로 주변 바다가 매립된 상태이다. 최상원 기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⑭ 순천왜성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패색이 짙어가던 1598년 음력 11월18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은 부산으로 철수하려 했지만, 순천왜성 앞바다에 버틴 조·명 연합 수군에 가로막혀 순천왜성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고립된 신세였다. 결국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남해왜성에 주둔해 있던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성왜성의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統虎), 부산에 주둔해 있던 테라자와 마사시게(寺澤正成)와 다치바나 나오쓰구(立花直次) 등이 일제히 수군을 이끌고 순천왜성으로 향했다.

고니시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천왜성 앞바다를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은 왜군의 긴박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왜군 구원부대부터 격파하기 위해 이날 밤 비밀리에 하동과 남해 사이 좁은 바닷길인 노량해협으로 이동했다. 고니시군 퇴로를 막은 채 그대로 있다가는 자칫 고니시군과 고니시를 구하러 오는 왜군 사이에 끼어 협공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 수군은 노량해협 서북쪽 하동 쪽에 진을 치고, 조선 수군은 노량해협 서남쪽 남해 쪽에 진을 쳤다. 왜군 구원부대의 앞길을 양쪽에서 미리 막아선 것이다.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의 뒷부분. 정왜기공도병은 애초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정왜기공도권’을 19세기 6폭짜리 병풍 2개에 다시 그린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2년 영국에서 뒷부분 병풍만 사들였다. 앞부분 병풍은 현재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의 뒷부분. 정왜기공도병은 애초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정왜기공도권’을 19세기 6폭짜리 병풍 2개에 다시 그린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2년 영국에서 뒷부분 병풍만 사들였다. 앞부분 병풍은 현재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담은 병풍인 ‘정왜기공도병’에서 순천왜성 전투 장면만 따로 그린 ‘정왜기공도’. 순천왜성의 구조와 수륙 합동작전으로 왜군을 공격하는 조·명 연합군의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순천시 제공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 등의 장면을 담은 병풍인 ‘정왜기공도병’에서 순천왜성 전투 장면만 따로 그린 ‘정왜기공도’. 순천왜성의 구조와 수륙 합동작전으로 왜군을 공격하는 조·명 연합군의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다. 순천시 제공

11월19일 새벽 조·명 연합 수군 전함 500여척과 왜군 전함 500여척이 좁은 노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렸다. 왜군은 노량해협을 통과하기 위해 명군 전함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이 화포로 공격해 명군을 구한 뒤 왜군 전함을 닥치는대로 격침시키자, 왜군은 배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왜군은 큰바다로 나가는 길로 착각하고 남해 관음포로 후퇴했다가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독 안의 쥐’처럼 맹렬하게 조·명 연합 수군에게 달려들었다. 화포를 쏘며 진행되던 전투는 근접전으로 바뀌었고, 결국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이날 새벽 2시께 시작된 전투는 정오까지 계속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왜군은 이날 오후 50여척의 전함만 이끌고 남해 창선도, 거제 장문포 등을 거쳐 부산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 수군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11월20일 새벽 고니시군은 순천왜성을 빠져나와 거제를 거쳐 부산으로 달아났다.

직접 북채를 쥐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이순신은 전투가 격렬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시마즈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덕장과 명군 장수 등자룡 등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순천왜성 천수대 모습. 천수대 위의 비석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순천시 제공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순천왜성 천수대 모습. 천수대 위의 비석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순천시 제공

부산에 집결한 왜군은 1598년 11월24일부터 11월28일 사이에 모두 본국으로 철수했다. 1592년 음력 4월14일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한·일·중 동북아 3국의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은 이렇게 끝났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6년 뒤인 1604년 6월25일 1등 공신 3명, 2등 공신 5명, 3등 공신 10명 등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18명을 선무공신으로 선정했다. 1등 공신엔 권율, 이순신, 원균이 이름을 올렸다.

■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고니시 유키나가군 1만4000여명은 1597년 가을부터 순천에 주둔했다. 이들은 순천왜성 북쪽 해안에 전함 500여척을 정박시켜 언제라도 철수할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제독 유정이 이끄는 3만5000여명의 명군 서로군은 순천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1598년 9월 중순 전주에서 출발했다. 도원수 권율 휘하 조선군 6000여명도 명군에 배속됐다. 명군 도독 진린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도 전함 500여척 규모의 연합 함대를 구성해, 9월18일 나로도를 출발해 20일 아침 순천왜성 앞바다에 도착했다. 조선 수군은 장도, 명 수군은 묘도 등 순천왜성 앞의 섬에 주둔하며 왜군의 바다 퇴각로를 차단했다.

조·명 연합군은 9월20일부터 6차례에 걸쳐 순천왜성을 점령하기 위한 수륙 합동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사천왜성에서 10월1일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정은 전의를 상실해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 수륙 합동작전에 육군을 이끄는 유정이 협조하지 않음에 따라 수군만 번번이 피해를 당했다.

조선 조정이 파견한 사후사로서 당시 순천왜성 전투를 직접 목격한 좌의정 이덕형은 유정의 태도에 대해 “유 제독이 2일 왜적의 성을 공격할 때 모든 군사가 성 아래로 60보쯤 전진했는데, 왜적의 총탄이 비오듯 하자, 제독은 끝내 깃발을 내려놓고 독전하지 않았습니다. 독전하지도 않고 또 철수도 하지 않아 각 군대로 하여금 반나절을 서서 보내게 하고 다만 왜적의 탄환만 받게 했으니, 제독이 한 짓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3일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하여 대총으로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막사를 맞추자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김수가 문을 열어 젖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제독은 노기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성 위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짖기를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중국 군대는 속히 쳐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기회가 이와 같은데도 팔짱만 끼고 지나쳤으니, 제독이 행한 일은 참으로 넋을 빼앗긴 사람과 같아서 장수와 군졸들이 모두 업신여기고 있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아직 복원되지 않아 옛 모습을 간직한 순천왜성 성벽. 일부 성곽과 장대는 2006년 복원됐으며, 지금도 일부 성벽에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아직 복원되지 않아 옛 모습을 간직한 순천왜성 성벽. 일부 성곽과 장대는 2006년 복원됐으며, 지금도 일부 성벽에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순천왜성 성벽. 성벽돌 제각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성벽 곳곳에 청색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순천왜성 성벽. 성벽돌 제각각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성벽 곳곳에 청색 테이프가 붙여져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결국 유정은 10월7일 조·명 연합군을 남원으로 철수시켰다. 앞서 9월 말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정벌하기 위해 순천왜성 앞에 집결하자 백성들은 숨겨뒀던 곡식을 스스로 앞다퉈 군량미로 내놨으나, 명군은 철수하며 군량 8900여석과 말·소, 무기 등을 버리고 갔다. 왜군은 8일 순천왜성에서 나와 명군이 버리고 간 모든 군량과 장비를 차지하고는 ‘군량과 무기가 부족했는데 중국과 조선이 우리에게 군량을 주고 무기까지 보조해주니 대단히 감사하다’고 쓴 깃발을 길에 꽂아 달아난 조·명 연합군을 비웃었다. 육상군이 없는 상태에서 수군만으로는 순천왜성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 10월9일 결국 조·명 연합 수군도 철수했다.

순천왜성 전투의 결과에 대해 이덕형은 “제독(유정)이 밤을 틈타 철수하자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왜교(순천왜성)에서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쌀이 길바닥에 낭자하였습니다. 왜교에 남은 식량도 아직 3000여석이나 되었는데 모두 불태우라고 명하였으나 타지 않은 것은 왜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철수할 때 수군은 조수를 이용해서 전진하여 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금번의 거사에 우리 군사는 거의 1만 수천 명이나 되었고 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매우 훌륭하였는데, 적의 성을 한 쪽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으며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였으니, 돌아와 아픈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8년 음력 8월18일 숨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한을 대리한 5대로는 미야기 토요모리(宮木豊盛)와 도쿠나가 나가마사(德永壽昌)를 조선에 보내 왜군 장수들에게 본국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남해안 곳곳에 주둔해 있던 왜군들은 11월15일까지 부산에 집결하기로 했다. 이 명령이 고니시에게 전달된 것은 조·명 연합군이 물러가고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10월 중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니시는 명 제독 유정에게 바닷길을 이용해 11월10일 부산으로 철수하게 해준다면 순천왜성과 모든 물자·장비를 명군에게 넘겨주겠다며 휴전을 제안했다. 순천에서 부산까지 먼길을 육상으로 철수하는 것은 조선 관군과 의병의 공격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투보다는 협상을 통한 종전을 희망하던 유정은 고니시의 제안을 받아들여, 왜군 철수를 지원할 부총병 오광 등 군사 40명을 순천왜성에 파견했다.

순천왜성 본성 성벽. 순천왜성 일부 성곽과 장대는 2006년 복원돼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일부 성벽에선 지금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순천왜성 본성 성벽. 순천왜성 일부 성곽과 장대는 2006년 복원돼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일부 성벽에선 지금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명군 도독 진린은 이 정보를 이순신에게 알렸다. 진린 역시 전투보다 협상을 원했지만, 경쟁자인 유정에게 모든 전공을 빼앗길 수 없었다. 특히 순천왜성이 유정에게 넘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조·명 연합 수군은 바다로 철수하는 고니시군을 격멸하기 위해, 500척 규모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11월9일 순천왜성 인근 광양만으로 다시 출전했다.

고니시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유정에 이어 진린도 매수하려 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은, 말, 돼지, 술, 창칼 등을 전하며 “전쟁에서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빌려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고니시는 이순신도 매수하려 했으나, 이순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선발대로 전함 10여척을 부산에 보내려는 것도 진로를 차단해 허용하지 않았다. 고니시가 진린에게 “강화를 약속하고도 어째서 싸우려 하는 것이오”라고 항의하자, 진린은 “이순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소”라고 답했다. 이순신은 고니시를 결코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순천왜성에서 고립된 고니시는 진린의 묵인하에 남해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사위 소 요시토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니시의 상황을 알게된 왜군들은 일제히 행동에 나섰다. 순천왜성 앞바다에서 고니시의 퇴로를 틀어쥐고 있던 조·명 연합 수군은 왜군 구원병력을 먼저 격파하기 위해 11월18일 밤 노량해협으로 서둘러 옮겨갔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음력 2월2일 선조는 별전에서 대신·육경·비변사 등 당상관들을 모아놓고 전쟁의 결과와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선 명군 서로군의 사령관으로서 순천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을 지휘했던 제독 유정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형조판서 이헌국이 “왜교성(순천왜성)에서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한밤중에 철수하여 도망갔는데 다음날 유 제독(유정)이 비로소 들어가 점거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자, 선조는 “적이 물러가 텅 빈 성이라면 어린 아이라도 들어가 점거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못마땅해 했다.

영돈녕부사 이산해는 “유 제독은 황제의 명을 받고 적을 치러 나왔으면서도 마침내 적은 치지 않고 도리어 그들(왜군)과 강화를 하였으니 매우 무상합니다. 적이 물러간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성첩을 허물어 성을 함락시킨 것처럼 하고, 땅에 묻은 시체의 머리를 잘라 자신이 잡은 것처럼 하는 등 조정을 기만하는 행위가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순천왜성 천수대. 임진왜란 당시엔 천수대 위에 기와지붕을 인 5층 망루이자 왜장 고니시가 거처했던 지휘소인 천수각이 세워져 있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순천왜성 천수대. 임진왜란 당시엔 천수대 위에 기와지붕을 인 5층 망루이자 왜장 고니시가 거처했던 지휘소인 천수각이 세워져 있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 전라도의 유일한 왜성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은 1597년 7월부터 전라도를 휩쓸고 북상했으나 채 두달도 되지 않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전주에서 주춤한다. 왜군은 8월말 전주에 모여 회의를 한 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만 계속 북상하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회군한다. 전남 순천으로 남하한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1597년 9월2일부터 12월2일에 순천왜성을 쌓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을 포함한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왜군이 쌓은 왜성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전남에서 유일한 왜성이다.

순천왜성 축성자에 대한 학설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쌓았다는 설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쌓아 주둔했다는 설로 나뉜다. 고니시가 1597년 12월2일 순천왜성 완공과 관련해 우키다 히데이에와 도도 다카도라에게 보낸 문서가 아사노(淺野) 가문에 남아있는데, 이 문서를 해석하기에 따라 축성 공사 완료 보고서로도 읽히고, 완성된 순천왜성에 대한 인수 확인서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순천왜성은 예교성, 왜교성, 왜성대, 망해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순천왜성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뒷산에 있다. 이 산의 산줄기는 광양만 바다로 길쭉하게 뻗어있고,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와 접해 있는데, 산줄기의 끝부분 구릉 꼭대기에 왜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때문에 바다에서 순천왜성을 보면 마치 섬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 섬은 육지와 좁고 예리한 다리로 연결된 듯한 착각을 일으켜 예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에 왜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왜교성, 왜성대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 일대가 예교 또는 왜교로 불렸다는 학설도 있다. 망해대는 광해군 때 순천부사로 부임한 이수광이 왜교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새로 붙인 것이다.

성 안 가장 높은 곳에는 기와로 지붕을 덮은 5층 망루가 세워졌다. 왜장 고니시가 거주하며 지휘했던 천수각이다. 천수각이 세워졌던 천수대에는 아직도 주춧돌이 남아있는데, 이를 통해 천수각 1층 면적은 가로 18m 세로 14m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육지로 이어진 서쪽에는 해자를 파서 바다와 통하게 했다. 해자 바깥쪽에는 목책도 설치했다.

고니시는 순천, 광양, 흥양, 보성, 낙안, 장흥 등 주변 고을에 군사를 배치해 순천왜성의 방어벽을 쳤다. 고니시는 또 오랜 전쟁에 지친 조선 백성들에게 일본 백성으로 인정하는 징표인 민패를 발급하고, 살던 곳에 그대로 정착해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는 일반 백성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회유책이면서, 동시에 세금으로 곡식을 거둬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방안이었다. 왜군에 투항해 부역행위를 하는 백성도 일부 있었지만 왜군의 회유 전략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 관군과 의병의 반격은 갈수록 거세졌다. 결국 고니시의 영향권은 갈수록 위축돼, 1598년 여름부터는 사실상 순천왜성과 인근 지역으로 한정됐다.

순천왜성 전투를 직접 목격했던 좌의정 이덕형은 “예교(순천왜성)는 산이 길게 바다로 뻗어나와 양쪽은 해변이고 한쪽은 육지와 이어져 있는데, 성을 다섯 겹으로 쌓아 외성을 함락시키더라도 내성이 또 있으므로 결코 함락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적의 가옥이 밖에서 보면 한 채도 없는 것 같으나 안에 들어가 돌아보면 수없이 많았습니다. 소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니 행장의 집이 동쪽에 있었는데(중략)”라고 선조에게 순천왜성의 구조를 설명했다.

순천지역 선비였던 조현범은 1784년 쓴 <강남악부>에서 순천왜성을 “만력 정유(1597년) 연간에 왜구가 이곳에 주둔하였다. 성(순천부 읍성)에서 20여리쯤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 육지와 맞닿았는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해 있어 한번 바라보면 끝이 없었다. 왜적이 겹으로 성을 쌓고 돌을 모아 탑을 만들었는데 층층이 계단도 있었다. 그 앞은 목장 하나라도 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넓었고, 그 평평하기는 손바닥 같았다. 가장 높은 대에는 필시 왜장이 거처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동남쪽 모퉁이는 돌벽인데 바다에 붙어 있어 몇 길이나 되는 지 알 수 없다. 왜적들이 위험을 피하고자 다리를 만들어 놓고 다녔는데 낮에는 설치하여 두고 밤이면 끊어 놓았다. 서북쪽 모퉁이는 육지와 통해 있어 적들은 피습당할 것을 우려하여, 땅을 파고 바닷물을 통하게 하려 섬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은 흔적은 지금도 있다. 실로 호남과 영남 사이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만하다”고 소개했다.

순천왜성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고적으로 지정됐고, 우리 정부는 62년 사적 제49호(승주 신성리성)로 지정했다. 하지만 96년 일제강점기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 과정을 거쳐, 97년 1월1일 사적에서 해제됐고, 다시 98년 1월1일 전남도기념물 제171호(순천왜성)로 지정됐다. 사적 지정 당시에는 면적이 32만1000㎡에 이르렀으나,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국유지인 임야 18만8428㎡로 축소됐다.

주변 바다는 율촌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매립되면서 좁은 수로만 남긴 채 육지로 바뀌었고, 고니시군의 탈출을 막기위해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섬인 장도는 매립용 흙으로 사용되면서 훼손됐다. 2006년 일부 성곽과 장대가 복원됐으며, 현재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순천왜성 복원 사업은 경남 사천시의 사천왜성 복원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복원된 순천왜성을 평가했다.

순천왜성 위치 및 구조
순천왜성 위치 및 구조

-순천왜성 주소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1.

-순천왜성 주변 관광지 : 낙안읍성, 선암사, 송광사, 순천만, 순천만정원 등.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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