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왼쪽은 윤희근 경찰청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 있는 주체들이 매뉴얼 뒤에 숨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치안당국도 마찬가지다. 150명 넘게 목숨을 잃었지만 ‘매뉴얼상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행정안전부가 2021년 3월 마련한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은 공공과 민간이 개최하는 지역축제에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주최자 없는 핼러윈 데이 행사에 정부와 행정당국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사회적 재난을 불완전한 규정과 시스템 탓으로 돌리며 주무 기관에 돌아올 책임을 모면하려는 관료적 무책임의 전형이다.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재난이나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안정적이고 신속한 대처를 위해 마련한 행정 지침이다. 매뉴얼이 없다는 게 행정당국이 위험 상황에 손 놓는 사유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역축제장 안전관리 매뉴얼’ 또한 “이 매뉴얼은 다양한 지역축제의 안전관리 및 사고 예방을 위한 참고자료로 관련 법령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축제장 내 각종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매뉴얼대로 했다’는 것도 뭐라도 했을 때 통하는 변명이다. 신현기 가톨릭대 교수(행정학)는 1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정부의 작위에 의한 잘못은 매뉴얼을 위반했는지를 따져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만, 이번 참사처럼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부작위’에 의한 책임은 그 자체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신 교수는 “주최가 없어 책임의 공백이 생기면 공공이 인프라와 정책으로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 그게 국가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건 법령이나 매뉴얼이 없어도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이기 때문에, 사회적 재난에 책임 있는 주체들이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매뉴얼 집착의 맹점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 사회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는 촌각을 다투는 구조·지원 현장에서 매뉴얼에 의존하다가 늑장 대응했다는 질타를 받았다.
‘애도’를 앞세워 책임을 따지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집권세력의 태도 역시 불신을 키우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날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국회 소관 상임위에 부르고도 ‘국가애도기간 정쟁 자제’를 내세워 질의응답 자체를 막았다. ‘애도의 시간’ 뒤로 책임 규명을 미루고, 책임을 논하는 것 자체를 ‘정치 공세’ 프레임에 엮어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정부가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 이상으로, 정부의 책임에 관한 사회적 토론 자체를 정치 공세로 몰아 억압하고, 축제 참여자와 상인들을 조사하는 등 사건을 범죄화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이상민 장관은 지난 31일 서울시청 앞 합동분향소에서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 논란을 키웠다.
김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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