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아무개(56)씨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한 화성8차 사건에 이어 이른바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도 결국 당시 경찰의 부실한 수사로 장기 미제사건으로 남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발생 다섯달 뒤 피해자의 유류품이 발견됐는데도 경찰은 이런 사실을 실종자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단순 가출사건으로 처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는 24일 “실종사건 발생 5개월 뒤에 한 야산에서 피해자의 유류품이 발견됐는데, (경찰이 이 내용을) 가족들에는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 근거로 피해자의 가족이 유류품 발견 사실을 통보받은 사실이 없고, 수사기록에도 통보했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은 1989년 7월18일 화성군 태안읍에 살던 김아무개(당시 9세)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다. 실종 5개월만인 같은해 12월 태안읍 병점리 한 야산에서 참새 사냥 중이던 마을주민들이 김양의 치마와 속옷, 책가방 등 유류품 10여점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7점에 대한 감정을 의뢰해 3점에서 사람의 혈흔을 발견했지만, 혈액형은 판정 불가라는 결과를 통보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화성에선 7차례의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해 전국적으로 떠들썩하던 때였다. 돌연 자취를 감춘 김양의 유류품 다수가 발견돼 강력 범죄 정황이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경찰은 이 사건을 단순 실종사건으로 처리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양의 주검을 찾지 못한 상태다. 당시 경찰이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실종사건 발생 이후 약 1년여 동안 당시 수사 경찰이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한 정황이 기록상 남아 있지만, 최종적으로 가출인(실종)으로 처리한 경위에 대해선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경찰 대다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피의자 이씨가 김양을 살해하고 주검과 유류품을 인근 야산에 유기했다고 밝힌 장소도 당시 수사 경찰이 지목한 장소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씨가 김양을 유기했다는 풀밭은 현재 아파트가 들어섰고, 경찰이 지목한 유류품이 발견된 장소에서도 100여m 떨어진 곳이어서 경찰은 정확한 범행 장소를 특정하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경찰은 모방범죄로 결론 내렸던 8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동안 수형생활을 한 윤아무개(52)씨의 재심청구와 관련해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일부를 공개하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윤씨의 권리구제의 필요성과 현재 진행 중인 검증수사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당시 윤씨 심문조서 및 당시 발부된 구속영장 등 모두 9건의 문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다만, 8차 사건 증거물에서 이씨의 디엔에이(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경찰은 8차 사건의 증거물이 화성사건 당시에도 유의미한 증거로 분류되지 않아 예상됐던 결과라며 이씨 자백의 신빙성을 검증해 범행을 입증하겠다고 전했다.
윤씨는 1988년 9월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박아무개(당시 13세) 양 집에 침입해 잠자던 박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동안 옥살이하고 특별사면을 받아 2009년 출소했다. 그는 이씨가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함에 따라 법원에 재심청구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