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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고려인, 한국에 잘 오셨습니다…목숨 건 3주 탈출기

등록 2022-04-07 04:59수정 2022-04-07 07:40

10살 딸, 14살 아들과 수백㎞ 거쳐 광주로
“매일 러시아군 폭격…아이들과 탈출 결심
피란 북새통으로 13일 만에 100여㎞ 이동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난민촌 거쳐 한국행”
우크라 탈출한 고려인 동포 2000여명 추산
5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온 이미하일로(왼쪽부터)씨, 김엘레나씨 부부가 탈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5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에 온 이미하일로(왼쪽부터)씨, 김엘레나씨 부부가 탈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폭격이 지나간 뒤 이웃집들이 무너져 있는 걸 보고 국경을 향해 탈출을 시작했어요.”

지난 5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만난 김엘레나(38)씨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옛 소련 지역 거주 한민족)인 김씨는 지난달 30일 전쟁을 피해 한국을 찾았다. 전쟁 초기 현지에서 두 아이와 머물던 기억을 얘기하던 김씨는 자주 말문이 막히고 몸서리를 쳤다. 옆에 있던 남편 이미하일로(41)씨 얼굴에서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차 갈아타고, 배 타고, 난민촌으로

이씨 부부는 14살 아들, 10살 딸과 함께 크림반도 북서쪽 항구도시인 미콜라이우에 살았다. 지난해 9월 단기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나와 일하던 이씨는 “2월24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에게 전화해 ‘어서 우크라이나 밖으로 피하라’ 는 말밖에 해줄 게 없어 절망스러웠다 ”고 회상했다.

김씨는 “남편 얘기를 듣고 러시아군이 미콜라이우로 접근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어 아이들과 집안에서만 지냈다”며 “2주일 정도 지나니 매일 폭격이 있었고, 폭격에 무너져 내린 이웃집을 보고 ‘이러다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미콜라이우는 크림반도에서 주요 전략거점인 오데사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는 도시다.

전쟁이 난 지 12일 만인 지난달 8일 집을 나서 차를 갈아타며 무조건 루마니아와 국경이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몰려든 차량으로 북새통이었고, 이동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온 지 13일 만인 지난달 21일 미콜라이우에서 100여㎞ 떨어진 오데사에 도착할 수 있었고, 운 좋게 배편으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난민촌으로 갈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폭격에 훼손된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 남아니따양의 집. 고려인마을 제공
러시아군의 폭격에 훼손된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 남아니따양의 집. 고려인마을 제공

김씨와 자녀들이 난민촌에 머무는 동안 남편 이씨는 한국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광주 고려인마을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난민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씨는 무작정 광주를 찾았다. 결국 광주 고려인마을의 지원으로 지난달 29일 루마니아로 날아가 가족을 만났고, 이튿날 온 가족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지난 5일 해외입국자 격리에서 풀려난 이들 가족은 광주 고려인마을 쪽에 감사 뜻을 전한 뒤 6일 이씨 일터가 있는 경기 안산으로 향했다.

고려인들 항공권 없어 발 동동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5700명가량이 살고 있는 광주 고려인마을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모금운동에 나서 6일까지 고려인 64명의 귀국을 도왔다.

이씨 부부에 앞서 귀국한 최마르크(13)군의 할머니 최아리나(61)씨는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에 사는 고려인으로부터 포격으로 숨진 이들이 많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 손자는 운 좋게 무사히 한국으로 왔지만 우크라이나와 주변국에 남아 있는 고려인 동포들이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김씨도 “미콜라이우에도 고려인 동포 20여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사를 모른다.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넘어간 경우가 많은데, 여권을 갱신하지 않아 사실상 무국적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피신한 남아니따(가운데)양 등 고려인 동포들이 3일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전쟁 반대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고려인마을 제공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피신한 남아니따(가운데)양 등 고려인 동포들이 3일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전쟁 반대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고려인마을 제공

고려인마을은 우크라이나를 탈출해 폴란드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머무는 고려인 동포를 2천여명으로 추산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 귀환을 원하지만 여권이나 항공료를 마련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 이에 법무부는 신분증만 있으면 단기비자를 발급해주는 등 우크라이나 현지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고려인 동포 등의 사증 신청 서류를 대폭 간소화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을 찾은 이들이라고 편한 것은 아니다. 크림반도 북쪽 헤르손에 살다 이번 전쟁으로 어머니와 헤어진 뒤 한국을 찾은 남아니따(10)양은 지난 3일 고려인마을에서 열린 전쟁 반대 캠페인에 참석해 “조상의 땅 한국에 오니 너무 좋다.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하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엄마를 만나고 싶다”며 울먹였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단 한명이라도 돕자는 생각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규모가 커졌다. 국내에 왔지만 살길이 막막한 고려인 동포에게는 숙소비와 자녀 진학, 취업 등을 지원해 정착을 돕겠다”고 말했다. 고려인마을에는 쌀, 의류, 주방용품 등 고려인 동포를 위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는 중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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