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태인서점
지하철 5호선 동남쪽 종점 마천역을 나서면 코끝이 싸하니 공기부터 다르다. 남한산 북서 등산로 입구라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추리닝 차림의 여자가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한다. 조붓한 찻길, 초록색 지선버스가 지나고 철물점, 비디오점, 지물포 등의 점포가 아침 일찍 문을 연다.
용마가 나왔다(마산), 말에게 물을 먹였다(마천)는 등 임경업과 관련된 지명이 있으나 이곳이 병자호란 때의 전장이었고 그 역시 호란과 관련해 비극적인 삶을 산 탓에 훗날 부회된 전설로 추정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 한적한 농촌이던 이곳이 사람들로 복닥거리게 된 것은 60년대 말. 청계천 주변 판잣집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하면서부터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창 골목길로 어지럽게 얽혔다. 80년대 재개발 붐과 함께 빈민가 티를 벗었고 아파트 단지들이 속속 들어서 쾌적한 이젠 시골읍내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마천1동 사무소 앞 건널목 건너 바로라는 말에 쉽게 찾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전화를 넣고야 말았다. “전화한 사람 맞지요?” 사람이 찾으러 나오고 길 건너에서 사람을 부르고, 굳이 건널목이 아니어도 눈치로 길을 건널 수 있는 곳. 태인서점(02-403-6215)은 길에 걸쳤으되 시장 맞은 편인데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두번째다.
“근처 세군데 책방 가운데 두 군데가 문을 닫았어요. 그만두고 싶지만 우리가게마저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요.”
주인 박영기(54)씨는 20여년 전 청계천에서 서점을 하던 중학교 동창의 권유로 헌책 세계에 발을 디뎠다. 친구와 함께 이발소를 차렸다가 10여년 과일·생선 노점을 해서 모은 돈 1600만원을 날린 뒤끝이었다. 80년대 초 헌책은 날개가 달렸다. 학기 초에는 하루 매출이 80만~100만원에 이르렀다고 안주인이 거들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순회하는 고물상이 20군데쯤 돼요. 무게 늘린다고 파지에 물을 뿌리는 중에 눈치보면서 고물자루를 풀어헤쳐 고르고 챙기고… 다시 원래대로 해 놓아야 하고, 여름이면 땀범벅이죠.”
아홉 살부터 책방에서 자란 딸은 공부를 잘해 시험만 보면 척척 붙었다. 만화 본다고 잔소리 많이 했는데,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왔고 결혼한 지금 다시 교대 3학년이다. 책을 팔면서 버릇처럼 딸 얘기를 한다. 사람은 책을 많이 보아야 공부를 잘 한다고.
“장사가 안돼 건물주한테 월세 5만원만 깎아달라고 말했더니 7년 전 그대로라고 하더군요.” 박씨는 겨울 동안 앙고라 장갑 도매를 한다. 딱 두달 책방은 부업이다. 그렇게라도 길이 열리니 고마운 일이다. “2~3년 전부터는 다들 어려워해요. 하지만 잘 사는 사람이 어디 헌책 사봅니까.” 스스로 서민층이려니와 서민층이 사는 곳에 헌책방을 연 게 도리여 헌책방을 그만두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7평. 이중 책꽂이에 알뜰하게도 꽂히고 쌓였다. 소설책과 어린이책이 많은 가운데 <인간복제 그 빛과 그림자>(궁리), <키루스 2세>(소담), <마크 트웨인 여행기)(상하, 범우사), <전쟁의 기억>(1~3권, 책세상)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대원사)가 눈에 띈다.
“건강한 것만도 복이지요. 마음 비우고 삽니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연재헌책방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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