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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심리학 ‘빅뱅’

등록 2006-11-09 21:29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모순에서 찾았던 사회과학의 시대는 가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심리학의 시대가 왔다. 사람풍경 에서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모순에서 찾았던 사회과학의 시대는 가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하는 심리학의 시대가 왔다. 사람풍경 에서
여자의…’ ‘설득의 …’ ‘나르시시즘의…’
제목에 심리학 들어간 책만 900여종
기댈 곳 없는 세상서 자기자신 돌아보는 등불로

커버스토리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는 삶의 근거를 저마다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 자기의 사랑의 서사를 스스로 써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데 심리학만큼 좋은 길잡이가 있을까요?”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은 작가 ㄱ씨는 심리학에 보통사람들의 흥미가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인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숲 속에 외로운 나그네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날은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심리학이 등불 구실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 검색창에서 ‘심리학’으로 검색하면 무려 900종 가까운 책이 뜬다. 행복·공감·욕망·만족·성격 따위 수많은 주제어 뒤에 ‘심리학’이 따라붙은 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출간된다. 가히 심리학의 시대다.

심리학 책들이 출판 시장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한 차례 출간됐고 2002년 개정판이 나온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은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업 기술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타인 혹은 고객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서인 셈이다.

심리학 책의 최근 흐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관심의 방향이 ‘나’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눈치의 심리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자기 분석 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나’를 주목한 전환점 <사람 풍경>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펴낸 교양인 출판사의 이승희 편집집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대다수가 ‘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샀다’고 쓴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타인의 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심리가 1차적 관심사인 셈이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를 낸 사이 출판사 권선희 대표도 같은 말을 한다.

“책을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형서점 심리학 코너를 찾는 독자들이 하나같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봍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진지한 태도가 잡히더라고요. ‘이거 내 얘긴데’ 느낄 때 책을 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넣어 책 제목을 지었습니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지난 7월에 나와 지금까지 7천부 정도가 팔렸다. 가볍지 않은 내용인 걸 감안하면 만만찮은 부수다.

심리학 책 흐름을 ‘자기’로 돌린 상징적 계기가 된 책으로 소설가 김형경씨의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은이가 자기 자신의 심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홀로 떠난 세계 여행과 겹쳐놓음으로써 설득력 있게 읽힌다.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의 풍경이 곧 자기 안에 펼쳐진 내면의 풍경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2004년 12월에 초판 발간 후 5만부 남짓 나간 이 책은 지난달 출판사를 바꾸고 책표지도 재단장해 새로 나온 뒤 1만4천부 정도가 더 나갔다.

최근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가 쓴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도 ‘관계의 가시에 찔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람 풍경>과 비슷한 노선에 서 있다. 다만 <사람 풍경>이 여행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진지해지면서 처세서의 심리 실용서와는 무게가 다른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온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미국에서 발달한 실험심리학 속으로 직진해 들어간다. 행동주의 심리학 창시자 버러스 프레데릭 스키너의 심리학을 비롯해 10가지 심리 실험을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4만부나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유혹의 심리학>(파트리크 르무안 지음)도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1만5천부 가량 팔렸다. 내용만 좋으면 사서 읽는다는 독자군이 형성된 셈이다.

북폴리오는 <유혹의 심리학> 성공에 힘입어 아예 ‘마인드북스’라는 심리 시리즈를 세우고 <욕망의 심리학> <마음의 치유>를 잇따라 펴냈다. 이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에 나온 책이 <여자의 심리학>이다. 나르시시즘 문제 가운데 특히 ‘여성의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화려함과 초라함, 자주성과 의존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여성들의 자기 진단과 자기 치유를 돕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행동양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면서 지나치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런 해결방식은 이들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과학의 시대 가니 심리학이…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의 고통과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길찾기’ 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한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분석’이다.

박미라(한겨레문화센터 ‘치유 글쓰기’ 진행자·전 <이프> 편집장)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다보니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목숨 걸고 돈만 벌었는데, 그 거친 삶이 자식 세대의 내면에 상처를 안겼고, 그 결과로 자기 마음을 알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가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학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불합리에서 찾았던 것인데, 이제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조적 고통은 그것대로 극복해야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죠. 저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만큼 세상을 개선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죠.”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네속에 이런게 들었구나…어린이 심리책도 뜬다

심리학 책 열풍은 어린이책 시장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린이에게 맞는 심리학 책이 등장한 것이다.

출판사 천둥거인(옛 돌베게어린이)가 펴낸 ‘어린이를 위한 심리학’ 시리즈는 아이들도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음에 주목한 만화책이다. 지난 3월 첫쨋권 <나 좀 내버려 둬!-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 나왔고 지난달 둘쨋권 <왜 나만 미워해!-복잡한 감정 이해하기>가 나왔다. 국내 어린이 심리상담 전문가인 박현진씨가 글을 썼다.

<나 좀 내버려 둬!>에서는 화·무서움·좌절감·불안·긴장감·짜증·죄책감·상실감 같은 기본적인 심리상태에 대해 알려주고 그 감정을 풀어내는 방법을 찾게 해준다. 이 책은 도입부에서 아이가 특정한 심리상태에 들어가는 상황을 보여준 뒤, 그런 심리가 어떤 것인지, 왜 그렇게 되는지, 어떤 때 그런 심리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어 아이가 그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아이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둘쨋권 <왜 나만 미워해!>는 친구 사귀기·열등감·질투심·주도권 다툼과 같은 문제를 다룬다.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생기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고 스스로 풀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책을 편집한 천둥거인 오세경 부장은 “이 책 이전에도 어린이용 심리 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내 필자가 우리 상황에 맞게 글을 쓴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책을 읽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심리를 알게 돼 도움이 된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고 말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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