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아침> 이경자 지음. 이룸 펴냄. 9700원
잠깐독서 /
이경자씨의 새 장편 <천 개의 아침>은 가난하고 막막했던 청춘의 한때를 회고한다. 1985년 동해. 그때 그곳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박정환과 최수영. 그러나 둘의 사랑은 결국 맺어지지 못하고, 두 사람은 젊음의 한 시절을 다만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서로 다른 생의 행로를 밟는다.
소설 앞머리에서 수영은 멀리 뉴질랜드에서 등기우편으로 온 책 한 권을 받는다. 발신인은 ‘박정환’. 바로 20여 년 전 동해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랑을 나누다가 기약 없이 헤어졌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내 온 한 권의 책을 매개로 소설은 20여 년 전 두 사람의 사랑의 현장으로 거슬러오른다.
허름한 여인숙에 장기 투숙하는 정환은 뱃사람들에게 여자를 알선하거나 자질구레한 밀수품을 운반하는가 하면, 이국의 남자와 결혼해서 이 땅을 떠나고자 하는 여자들의 영어 편지를 대필해 주거나 하면서 세월을 죽인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대학을 나와 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학비를 벌고자 양귀비를 재배하다가 발각되어 감옥을 다녀온 처지. 한편 수영은 대학 시험에 낙방한 뒤 작은 선물가게를 운영하다가 정환을 만나게 된다.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수영에게 정환은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으로 오해되고, 정환은 미적미적대다가 그런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수영과 깊은 관계로 나아간다.
청춘의 사랑이 분단과 이념의 덫에 걸려 고꾸라지는 것은 아무래도 80년대라는 시대의 상흔이라 해야 할 터. 정환은 일본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사람을 만났다가 간첩으로 몰려 구속되고, 수영은 어릴 때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납북어부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남은 것은 파국과 이별. 그리고 긴 암전.
항구 주변의 남루한 풍경과 그 풍경에 어울리는 인간 군상, 그리고 가난과 이념에 주박된 인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소설 제목은 가난한 청춘의 사랑을 노래한 브라더스 포의 <일곱 송이 수선화>의 가사에서 왔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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