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허영만 〈식객〉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살기 위해 먹는데, 다른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하곤 했다.” 철학자 열전을 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즐겨 인용한다. 하지만 이것이 철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을 보살펴라’고 가르쳤듯이 정신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인들이 과장해서 전하듯 물질적 욕구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에 매달리지 말라고 가르친 것일 뿐이다. 어쨌든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대로의 소크라테스가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 참 많다고 하지 않을까? 고대 소피스트들이 대중에게 수사법을 가르치듯이, 온갖 매체를 통해서 요리법이 전수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만화만 하더라도, 〈맛의 달인〉, 〈미스터 초밥왕〉, 〈명가의 술〉, 〈신의 물방울〉 등 먹고 마시는 일을 글과 그림의 예술로 표현한 작품들이 이미 적지 않다. 이들은 모두 일본 만화이지만, 국내 만화에서는 허영만의 〈식객〉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프랑스 작가 보마르셰가 그랬던가. “인간은 목마르지 않아도 마신다”고. 이에 빗대어 말하면, 인간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분명히 인간에게는 먹고 마시는 일이 생존과 연관해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당연히 살기 위해 먹어야 하지만, 먹기 위해 산다는 말도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식객〉에도 이를 증명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한강대교 위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던 남자가 ‘가을 전어’ 맛에 홀려 자살 의지를 접는다.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는 시인 소동파의 말까지 들먹이며, 황복 요리의 맛을 찾아 한국까지 온 중국 사람도 등장한다. 이보다 더한 예도 있다. 요리의 명인들이, 먹어야 산다는 인간 조건을 역행해,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지고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음식을 만들고 술을 빚으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모든 현상은 ‘먹기 위해 사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든 것은 ‘만들기 위해 사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간은 만들기 위해서 산다. 혹자는 그 역이 더 맞는 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뭔가를 만든다는 그럴듯한 명제 말이다. 하지만 이 경우 후자가 더 보편성을 가질 가능성은 낮을 뿐만 아니라, 둘 사이는 서로 비기는 관계도 아니다. 혹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만들기 위해 산다는 말이 진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창조 행위의 특성이다. 생존과 섭생의 관계와는 달리, 인간 존재와 창조의 관계에서 창조 행위는 생존의 필요에 종속적이지 않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은 필연적이고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살기 위해서 만든다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지금까지 좀 ‘덜’ 만들면서 살아왔어야 했을지 모른다. 물론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수많은 피조물들은 기초적인 생존에 필요해서 만든 게 아니다. 그 예는 너무 많고 명백해서 굳이 들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인간에게 뭔가 만들지 못하게 한다면 존재 의미를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들기 위해 산다’는 명제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보이는 데에 진리 탐구의 길이 있다. 그것은 21세기 문화철학의 핵심 주제이며,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성숙한 지식인이 되어서도 계속 붙들고 가야 할 시대의 화두일 것이다.
인간의 이 수수께끼 같은 창조 욕구와 생산력은 그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드러나지 않게 작동해서 겉으로 보이는 다른 현상의 이면에 잠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식·주와 연관된 창조 행위다. 더구나 음식 요리의 경우, 곧 사라질 것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여 창조하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 독특함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맞지 않다. 인간이 먹기 위해 산다거나 마시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만들고 만든 것을 즐기기 위해 사는 인간 행위가 그 이면에 잠재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욕구’는 식욕이 아니라 바로 창조욕과 창조물 향유욕인 것이다. 작가 허영만씨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창조란 요리가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요리는 인간 창조 행위의 독특함과 미묘함을 보여줌에 틀림없다. 〈식객〉을 이런 관점에서 보고 읽는다면, 분명 창조의 비밀에 이르는 흥미롭고 깊은 사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인간의 이 수수께끼 같은 창조 욕구와 생산력은 그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드러나지 않게 작동해서 겉으로 보이는 다른 현상의 이면에 잠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식·주와 연관된 창조 행위다. 더구나 음식 요리의 경우, 곧 사라질 것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여 창조하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 독특함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맞지 않다. 인간이 먹기 위해 산다거나 마시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만들고 만든 것을 즐기기 위해 사는 인간 행위가 그 이면에 잠재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욕구’는 식욕이 아니라 바로 창조욕과 창조물 향유욕인 것이다. 작가 허영만씨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창조란 요리가 아닐까”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요리는 인간 창조 행위의 독특함과 미묘함을 보여줌에 틀림없다. 〈식객〉을 이런 관점에서 보고 읽는다면, 분명 창조의 비밀에 이르는 흥미롭고 깊은 사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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