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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재일동포 시인이 원문 살린 ‘조선시집’

등록 2007-12-28 20:26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일본에서 우편물이 왔다. 책이었다. 〈재역 조선시집〉. 권위의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이다. 번역자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김시종.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 시인이다. 지난 2월 오사카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앞에 놓고 자신의 지난 삶과 문학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재역 조선시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그때 했었다.(〈한겨레〉 2007년 2월 10일 치 15면)

‘재역’, 곧 다시 번역한다는 데에 이 책의 독특함이 있다. 〈조선시집〉은 본래 김소운(1908~81)의 번역으로 1943년 이와나미에서 출간되었다. 한용운·김소월·이상에서부터 정지용·서정주·유치환까지 41명의 시 121편을 수록한 이 책은 우아하고 격조 높은 일본어를 구사하여 일본 문단에서 격찬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면서 일본 독자들에게 한국 시의 길라잡이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1929년생인 김시종 역시 열네 살 소년 시절에 〈조선시집〉을 접했다. 당시는 일제 식민 당국의 조선어 말살책으로 조선어로 된 시를 쓰거나 읽을 수 없는 시기였다. “황국신민 교육을 받고 있던 때였는데, 〈조선시집〉을 접하고서야 우리에게도 일본의 기타하라 하쿠슈나 시마자키 도손에 못지않은 탁월한 근대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2월에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다.

그는 〈조선시집〉을 감탄과 감동으로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생겼다고 했다. 조선어를 모르는 일본 문인들이 〈조선시집〉의 번역을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근거는 무얼까? 그 숙제를 푸는 데 60여 년이 걸렸다. 제주 4·3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밀항한 그는 총련에 소속됐기 때문에 한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1998년에 처음으로 제주를 찾을 수 있었고, 2004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 무렵을 전후해서야 〈조선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원문을 확인할 수 있었고, 김소운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저도 김소운 선생의 번역본을 통해 처음 우리 시를 알게 되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만, 〈조선시집〉은 번역의 관점에서 많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김소운 선생은 일본 시의 정형률인 7·5조 또는 5·7조에 맞추느라 원시를 과도하게 변형시켰습니다. 원시에 없는 말을 쓴 경우도 많았구요. 번역이라기보다는 김소운 자신의 창작에 가깝다는 느낌조차 줍니다.”

이하윤의 〈들국화〉를 보자. 두 연으로 된 원시의 둘째 연은 이러하다: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빛과 향기 조곰도 거짓 없길래/ 나는 그들이 읊은 시를 사랑합니다.” 이것을 김소운의 번역과 비교해 보자: “들꽃 마음 그대로/ 이 나라에 돋아난 시인/ 혼자 피어 혼자 지고/ 거짓없는 노래 기쁨이여.”


김소운의 번역이 원시의 큰 뜻을 전하고는 있지만 원문을 심각하게 훼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에 충실하게’를 모토로 삼은 〈재역 조선시집〉은 일본어 번역과 한국어 원문을 함께 실어 양쪽을 대조할 수 있도록 했다.

겨레의 말과 문화가 멸실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식민 모국의 언어로나마 조선문학의 정수를 보존해 놓은 김소운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집〉과 〈재역 조선시집〉이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경쟁자이자 협력자로서 생산적인 대화를 이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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