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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말’로 세상 읽은 새 중국소설

등록 2008-01-25 21:43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말들은 사전에서 나와 저자를 떠돌다가 다시 사전으로 돌아가 눕는다. 사전은 말들의 고향, 말들의 모천(母川)이다. 저자를 떠도는 동안 말들은 목숨이 다해 스러지거나 저를 닮은 새끼를 낳아서는 저 대신 사전 속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사전은 말들의 태반이자 무덤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책은 사전에서 빚어지며 또한 사전을 지향한다. 시인이 창안한 비유와 소설가가 탄생시킨 인물은 사전에 등재됨으로써 언어 공화국의 시민권을 얻는다. 사전은 책들의 집적이자 압축이다. 거꾸로, 책이란 사전의 표제어들에 대한 제 나름의 설명이자 확장이기 십상이다.

웬 사전 얘기냐고? 중국 작가 한샤오공(한소공)의 소설 〈마교사전〉(심규호·유소영 옮김, 민음사)을 소개하려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중국에서 1996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제목에서 보듯 ‘마교’라는 지역 사람들이 쓰는 말들을 사전처럼 설명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마교는 작가가 1968년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되었던 호남성 멱라현의 궁벽진 산골 마을. 40여 가구가 가축을 기르고 논밭을 일구며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이 구사하는 독특한 어휘가 장래의 작가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자 창작의 영감으로 다가왔다.

가령 이곳 사람들은 ‘흩어져 버리다’(散發)라는 말로 죽음을 가리킨다. 몸을 이루고 있던 온갖 요소들이 흙과 물과 기와 바람으로 나뉘어서 흩어진다는 불교적 사생관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누나나 언니를 ‘작은형’(小哥)이라 부르고 여동생을 ‘작은남동생’, 고모를 ‘작은백부’, 이모를 ‘작은외삼촌’ 식으로 남자 친척의 호칭 앞에 일관되게 ‘작은’을 붙여 여자 친척을 가리키는 것은 봉건적 남존여비의 흔적일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자어 ‘각성’(覺醒)을 이루는 두 어휘에 대한 마교 식 정의이다. ‘마교어’에서 ‘깨닫다’(覺)는 우둔하다는 뜻이며 ‘깨다’(醒)는 어리석다는 뜻이다. 표준어와는 정반대되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마명이라는 인물의 예를 보자. “사람들은 가난하고 천한 그를 보며 더럽고 고집 세고 우둔하고 백치 같다고 탄식하고, 마치 개처럼 사는 그를 한껏 비웃는다.”(87쪽) 그러나 대약진운동,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같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숱한 영리한 이들이 제 명을 다하지 못한 반면, 우둔한 마명만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깨끗하고 온전하게 살아남았으니 과연 누가 영리하고 누가 어리석은 것인가?

같은 이치를 ‘불화기’(不和氣)와 ‘괴기’(怪氣)라는 말에서도 만날 수 있다. ‘마교사전’에서 ‘불화기’란 아름답다는 뜻으로, ‘괴기’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으로 쓰인다. 마교 제일의 미색을 자랑하던 철향이 동네에 우환을 불러오고 공산당 서기이던 남편을 조롱거리로 만든 끝에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거나, 두뇌와 손재주가 뛰어나 못 하는 일이 없던 염오가 형무소를 들락거며 불행한 인생을 산다는 이야기는 두 말이 왜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를 알게 해 준다.


소설은 이처럼 100여 개의 마교 식 어휘에 대한 설명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열함으로써 모자이크 같은 전체의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총체성이 아닌 파편성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큰 사건과 격정적인 인물들이 등장해서 극적인 서사를 엮어 가던 여느 중국 소설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유형의 중국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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