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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제3자의 눈으로 본 ‘식민지 근대화’

등록 2008-04-04 22:03

〈제국의 후예〉
〈제국의 후예〉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제국의 후예〉
카터 J. 에커트 지음·주익종 옮김/ 푸른역사·2만8000원

한국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고민하는 학자라면, 그리고 그 결론이 놀랍게도 일본의 식민지배가 명백하게 모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식민지 유산은 깊은 그늘과 파우스트적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라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지 않다면 아무리 실증성을 바탕으로 학문적 고투의 결과를 내놓는다 해도, 불행했던 식민지 체험을 미화하고 만다.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는가. 나라 잃은 식민지인들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에 대해 그토록 무심해도 좋은 것인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거짓을 사실처럼 꾸며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고통 받은 민족의 후예로서 이 놀라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학자의 운명을 걸고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 문제를 놓고 두려워하고 망설이고 허탈해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은, 이 땅의 학자가 아니라 카터 J. 에커트라는 벽안의 학자였다.

<제국의 후예>는 경성방직을 중심으로 한국 자본주의 발흥사를 톺아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주목을 받는 것은 이른바 맹아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 특징을 “단순히 시장 관계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만이 아니라, 기계제 공업의 우위”라는 점에 두고 있다. 바로 이 처지에서 보자면, 자생적인 근대의 가능성은 현격히 낮아지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 자본주의를 처음으로 만들어낸 도가니”가 된다.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은이의 주장이 충분한 논리적 근거와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이리라.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1919년은 상당히 중요하다.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지면서 지주자본이 공업으로 옮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첫 요소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니, 자본주의적 경영 감각과 자금력을 확보한 무리가 나타났다. 둘째는 경제조건이 바뀌면서 토지 투자보다 공업 분야에서 더 많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식민지 개발정책이 바뀌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을 터다. 중요한 것은 왜 정책이 바뀌었냐는 점이다. 먼저 분할통치를 위해서였다. 3ㆍ1 운동 같은 민족운동을 철저히 막으려면 계급분화와 계급갈등을 조장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토착 기업가가 참여하는 공업화를 용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용인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토착인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제국의 목표에 부합하는 경제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식민지 유산이 자본주의적 발전이었다면, 거기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이 벽안의 학자는 “섬뜩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식민지 시대의 발전은 강권적인 국가권력과 높은 대외 의존도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은 놀랍게도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다시 출현한다. 도대체 식민지 시대에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 안겨준 질기고 질긴 불행의 그림자를 걷어내려 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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