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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물기 젖은 눈으로 ‘설운 서른’ 돌아보기

등록 2008-05-30 19:55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아빠, 386이 뭐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 부쩍 관심이 높아진 아이가 묻는다. ‘촛불집회, 386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386과는 오래전에 작별했고 486도 어느덧 저물어 가는, 이제 바야흐로 586을 바라보게끔 된 아비는 새삼스러운 감회에 잠긴다. 그리고 물기 젖은 눈으로 돌아본다. 자신이 아직 386이었던 시절을, 그러니까 자신의 지나간 삼십대를.

“씨 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고정희 <사십대> 부분)

고정희의 쓸쓸한 시를 다시 만난 것은 <설운 서른>(버티고)이라는 제목의 편집 시집에서였다. ‘흘러가다 잠시 멈추는 시간, 서른’이라는 부제를 지닌, 서른을 노래한 시인 50명의 시를 한데 묶은 책이다. 서른이란 무엇인가? 더는 청춘이 아닌 나이, 방황과 자유가 정착과 책임에 자리를 내주는 나이. 한마디로, 되게 재미없어지는 나이다. 서른을 노래한 시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 최승자의 <삼십 세>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 //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최승자 <삼십 세> 부분)

최승자만이 아니라 다른 시인들에게서도 서른을 다룬 시들은 대체로 불길하고 음울한 어조를 수반한다. 서른은커녕 마흔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 돌이켜보노라면 서른은 얼마나 아련하고 설레는 나이인가. 그러나 꽃 같은 이십대를 뒤로하고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이제 막 서른이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시인들에게 서른은 한없이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몸과 마음이 자주 등 돌리네/ 동명이인,/ 그 얌전한 사람에 들어가면/ 행간 없이 한 벌/ 다정할 수 있을까// (…) // 도대체 어디에서 한번 후련할까/ 삶이 둘 다 못 보고 지나가면/ 어둔 강 밤새 걷다/ 어깨 끌어안고 함께 울까”(김경미 <삼십대> 부분)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겁고 씁쓸한 나이 서른,/ 견딜 만큼은 견뎌야지/ 삶이란 걸 공짜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변기의 물을 내리면/ 스무 살의 아련함이 쓸려간다”(김경진 <서른 살> 부분)

서른은 확실히 청춘의 무덤이다. 이형기의 시 <낙화>는 그런 맥락에서 서른 즈음에 맞는 청춘의 죽음을 근조한 노래로 재해석된다.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이형기 <낙화> 부분)

그런데 이 시에서 청춘의 시듦은 안타깝거나 쓸쓸한 어조로 노래되지 않는다. 결실의 가을을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삼십이립’이라는 옛사람의 말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지. 청춘과 결실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모든 서른 살들에게 이 책 <설운 서른>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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