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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6월 21일 잠깐 독서

등록 2008-06-20 17:15

〈엔돌핀 프로젝트〉
〈엔돌핀 프로젝트〉
■ 죽음 내모는 현실 속 ‘순수의 갈망’

〈엔돌핀 프로젝트〉

“죽음이란 혼의 해방인가.”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 좀더 나아가 죽음의 언저리로 타박타박 독자를 이끈다. “죽는 자의 대부분은 환한 표정을 짓는다. …육체의 감옥을 빠져나온 영혼의 해방에 따른 놀라운 쾌감이 있었을 터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주인공 또한 그 ‘쾌감’을 맛본 뒤로, 습관처럼 ‘임사’의 지점으로 자신을 밀어넣는다. 소설가 박범신의 이른바 ‘엔돌핀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육신이 처한 비루한 현실, 그 현실에서 허우적대는 육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몸부림이다. 재직 내내 동기보다 진급이 늦다가 외환위기 뒤 결국 명퇴를 당한다. “퇴직금을 조금씩 주식에 투자했고, 조금씩 실패”한다. 이혼한 아내는 식당과 노래방을 오가다 도박에 빠진다. 현실의 광포함은 ‘무작위성’에서 비롯된다는 듯, 주인공의 비극은 철저히 상투적이다. 외동딸 애린마저 원조교제에 내몰린다. 좁은 옥탑방에 유폐되어 다섯달 집세를 내지 못한 49살 주인공에게 유일한 존재증명이던 늦둥이. 소담스레 흰눈이 내리는 날, 프로젝트는 바투 막바지에 닿는다. 쾌감과 향기가 퍼져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는 절정은 갓 세수한 아이의 얼굴처럼 말갛다. ‘엔돌핀’은 그저 ‘해방’을 탐하는 욕망에서 욕된 현실을 치유할 ‘순수’에 대한 갈망으로 무장 번진다. 애린이 아버지의 주검에서 신비한 향기를 맡는 까닭일 것이다. /중앙북스·6700원.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 ‘전통사회 밑바닥’ 드러낸 가족사


〈대한민국 원주민〉
〈대한민국 원주민〉
〈대한민국 원주민〉

“그것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잘라내버린 그녀의 꿈까지 내 알량한 재주 아래 어딘가 가만히 묻혀 있을 것이다.”


열일곱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 가족들 먹여 살리고 남동생 미술학원비를 내주는 누나 이야기는 ‘누나의 꿈’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얼마전 인기 있었던 대중가요 제목과도 같지만, 동시대를 사는 ‘젊은’ 작가가 그리는 ‘누나의 꿈’은 요즘 영화나 노래에서는 찾기 힘든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동시대적이다. 엄마가 계란볶음밥을 한가득 볶아 아이와 함께 방에 두고 문을 잠근 채 일을 나가자 창호지를 뜯으며 자지러지는 꼬마 이야기는 어떤가. 장남이 도시로 유학 가자 밥 해주러 따라나서야 했던 장녀 이야기는?

풍족해보이는 현대에서 ‘가난한 과거’를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 조각이 모여 작가의 가족사를 이룬다. 작가는 가족들을 인터뷰해 기억의 깊숙한 곳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이는 억압된 기억을 들춰내 “처음으로 깊숙이 묻어만 두었던 젖은 꿈들을 볕에 내어 말리는”, 일종의 정신분석 치료 효과를 갖는 듯하다. 가난하고 무력해 거짓말로 자신을 방어하던 어린시절의 그를, 이제는 어른이 된 그가 토닥여주는 장면처럼 말이다. 이들이 “전통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대한민국 원주민’이기에, 억압되고 무시당한 기억 투성이인 대한민국을 만화로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규석 지음/창비·1만1000원.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 IMF발생~극복 ‘생생한 체감록’


〈외환위기 징비록 〉
〈외환위기 징비록 〉
〈외환위기 징비록 〉

1997년 외환위기는 왜, 어떻게 닥쳤나. 한국 경제는 그 충격을 제대로 ‘극복’한 걸까. 재경원 2차관보,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 수석대표, 재경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 등 당시 핵심 경제관료로서 사태의 발생과 대응, 수습과정을 일선에서 체감한 정덕구씨의 <외환위기 징비록>은 그런 의문에 대한 또 하나의 유력한 답이다.

여기서 마주치는 게 ‘미국 음모설’. 미국, 특히 월스트리트가 한국을 ‘아메리칸 스탠더드’로 길들이려고 외환위기를 조장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나. 이에 대한 언급은 길지 않지만 지은이는 미국이 “외환위기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일부러 일으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가 당시 한국 자동차업체들이 미국을 제치고 제3국의 국영 자동차기업을 인수하거나 국산차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컬러텔레비전과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조처를 한국이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한 것 등이 미국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한 점, 그리고 유럽과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이 동아시아를 중시하면서 영향력 키우기에 부심했고, 자국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일본형 경제모델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한 대목은 흥미롭다./삼성경제연구소·2만5000원.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제국·신자유주의에 맞선 나라들


〈세계의 발화지점들〉
〈세계의 발화지점들〉
〈세계의 발화지점들〉

독일 철학자 헤겔의 역사 변증법에서 보듯, 인류의 역사는 부단한 대안 찾기의 과정이다. 대안 찾기는 현실의 모순이 가장 큰 지점에서 이뤄진다. 많은 이들은 냉전 뒤 21세기 초의 세계를 신자유주의로 설명한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보기도 한다. 이 책의 부제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중동·남미를 중심으로 구성한 <세계의 발화지점들>은 곧 모순의 지점들이다. 예컨대 테러집단이란 국제적 비난을 면치 못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은 미국 주도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에 큰 걸림돌이다. 미국의 침공을 받은 이라크는 군홧발 아래서 인간·사회·제도의 파괴를 겪었지만, 재건은 요원해 보인다. 2005년 프랑스 이주노동자들의 소요는, 좌우를 막론하고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로 돌아서면서 생겨난 구조조정·고실업과 무관치 않다. 남미 일부 지역에선 진보적 성격의 ‘좌파’ 정권들이 좀처럼 세력을 잃지 않는다.

대안 찾기는 끝나지 않는다. 억압성을 떨치지 못한 이슬람주의나 민주주의 후퇴란 비난을 받는 우고 차베스 정권 등을 합당한 대안으로 보기는 어렵다. 엮은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이 시작된 지 30여년, 미국의 제국주의가 공공연하게 본모습을 드러낸 지는 10여년이 지났으니” 다시금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운동·사상을 개관해 볼 시점이 됐다고 말한다. 리오 패니치 등 엮음·이고성 옮김/필맥·2만3000원.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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