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권력암투 다룬 소설 ‘명주기봉’이?

등록 2005-06-16 16:30수정 2006-02-06 20:34

헌책방 순례/혜성서점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잡은 혜성서점(02-741-0143). 문고판, 프랑스어 어린이책을 지나면 근자에 나온 헌책들이 꽂혔거나 쌓여 있다. 책들이 깔깔하다. ㄱ자 통로의 코너에 주인이 버티고 앉아 더이상 접근을 막는다. 들어올 때 한차례 눈길을 주었을 뿐 읽던 책으로 다시 옮겨간 주인의 시선은 완강하다. ‘도대체 읽는 책이 뭐기에.’

주인의 다리를 밀어내고 안쪽으로 들어가 낡은 책들을 보다가 문득 통로 끝 천장에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시커먼 책이 눈에 들어왔다. <명주기봉> 하, <쌍천기봉> 중. 엥? 문화재관리국 장서각 귀중본 총서로 1978년, 79년에 200부 한정 영인한 궁체 한글본이다. 송·명대를 배경으로 귀족들의 남녀관계, 권력 암투를 다룬 ‘가문소설’. 궁중 또는 사대부 여인들이 주로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명주보월빙>, <윤하정삼문취록>과 <완월회맹연>은 활자본으로 풀어 펴낸 바 있으나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몇 차례 영인되었을 뿐이다. 일반인들한테는 부담스럽고 연구자가 한정돼 굳이 풀어쓸 필요 없는 축이다.

책 구경이 끝나서야 비로소 주인 전순인(67)씨와 눈이 마주쳤다. 혜화동 안국동 충신동 명륜동 성북동 등이 혜성서점의 관할구역. 유서깊은 동네들인데다 작가 문인이 많이 살아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문집 같은 한적은 더이상 안 나와. 저거? 다 족보야. 고서점은 이제 끝이야. 고서를 보는 사람도 없고 수집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1969년 중간상으로 책을 만지기 시작한 전씨는 79년에 10여년의 눈썰미로 목좋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와 그 덕에 ‘먹고 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80년대 재개발 붐이 일면서 사람들은 새 집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을 털어내고, 강남으로 이사가는 사람들 역시 그 책들을 버렸다. 책방으로서는 노다지였던 셈. 그러나 엄청나게 쏟아지던 고서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뚝 끊겼다. 요즘은 고서보다는 헌책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고서랄 것도 없는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영광의 그림자인 셈이다.


“책장사 35년인데 아직도 보지 못한 책들이 나와.” 40~50년대 책이 종류와 내용에서 의외로 풍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 주인한테 그럴 정도면 내공이 얕은 손님한테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벽 한바닥 가득 꽂힌 누렇게 바랜 책들이 새삼스럽다.

“요즘 학생들 책 안 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일체 안 와.” ‘문화의 거리’라는 대학로가 멀지 않고 학생들로 버글거리는 성균관대가 코 닿을 거리. 전씨의 말에는 회한과 약간의 분노가 어렸다. 그래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점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한다며 자위다. 그가 보던 책은 <藝(예)에 살다>(김충현, 범우사). 팔라고 하니, 보는 책을 왜 그러느냐며 거절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