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책방 순례/혜성서점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잡은 혜성서점(02-741-0143). 문고판, 프랑스어 어린이책을 지나면 근자에 나온 헌책들이 꽂혔거나 쌓여 있다. 책들이 깔깔하다. ㄱ자 통로의 코너에 주인이 버티고 앉아 더이상 접근을 막는다. 들어올 때 한차례 눈길을 주었을 뿐 읽던 책으로 다시 옮겨간 주인의 시선은 완강하다. ‘도대체 읽는 책이 뭐기에.’
주인의 다리를 밀어내고 안쪽으로 들어가 낡은 책들을 보다가 문득 통로 끝 천장에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시커먼 책이 눈에 들어왔다. <명주기봉> 하, <쌍천기봉> 중. 엥? 문화재관리국 장서각 귀중본 총서로 1978년, 79년에 200부 한정 영인한 궁체 한글본이다. 송·명대를 배경으로 귀족들의 남녀관계, 권력 암투를 다룬 ‘가문소설’. 궁중 또는 사대부 여인들이 주로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명주보월빙>, <윤하정삼문취록>과 <완월회맹연>은 활자본으로 풀어 펴낸 바 있으나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몇 차례 영인되었을 뿐이다. 일반인들한테는 부담스럽고 연구자가 한정돼 굳이 풀어쓸 필요 없는 축이다.
책 구경이 끝나서야 비로소 주인 전순인(67)씨와 눈이 마주쳤다. 혜화동 안국동 충신동 명륜동 성북동 등이 혜성서점의 관할구역. 유서깊은 동네들인데다 작가 문인이 많이 살아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문집 같은 한적은 더이상 안 나와. 저거? 다 족보야. 고서점은 이제 끝이야. 고서를 보는 사람도 없고 수집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1969년 중간상으로 책을 만지기 시작한 전씨는 79년에 10여년의 눈썰미로 목좋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쏠쏠한 책들이 많이 나와 그 덕에 ‘먹고 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80년대 재개발 붐이 일면서 사람들은 새 집에 어울리지 않는 책들을 털어내고, 강남으로 이사가는 사람들 역시 그 책들을 버렸다. 책방으로서는 노다지였던 셈. 그러나 엄청나게 쏟아지던 고서는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뚝 끊겼다. 요즘은 고서보다는 헌책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되었다.
고서랄 것도 없는 <명주기봉>과 <쌍천기봉>은 영광의 그림자인 셈이다.
“책장사 35년인데 아직도 보지 못한 책들이 나와.” 40~50년대 책이 종류와 내용에서 의외로 풍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 주인한테 그럴 정도면 내공이 얕은 손님한테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벽 한바닥 가득 꽂힌 누렇게 바랜 책들이 새삼스럽다. “요즘 학생들 책 안 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일체 안 와.” ‘문화의 거리’라는 대학로가 멀지 않고 학생들로 버글거리는 성균관대가 코 닿을 거리. 전씨의 말에는 회한과 약간의 분노가 어렸다. 그래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점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한다며 자위다. 그가 보던 책은 <藝(예)에 살다>(김충현, 범우사). 팔라고 하니, 보는 책을 왜 그러느냐며 거절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책장사 35년인데 아직도 보지 못한 책들이 나와.” 40~50년대 책이 종류와 내용에서 의외로 풍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 주인한테 그럴 정도면 내공이 얕은 손님한테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벽 한바닥 가득 꽂힌 누렇게 바랜 책들이 새삼스럽다. “요즘 학생들 책 안 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일체 안 와.” ‘문화의 거리’라는 대학로가 멀지 않고 학생들로 버글거리는 성균관대가 코 닿을 거리. 전씨의 말에는 회한과 약간의 분노가 어렸다. 그래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점이 있어줘서 고맙다고 한다며 자위다. 그가 보던 책은 <藝(예)에 살다>(김충현, 범우사). 팔라고 하니, 보는 책을 왜 그러느냐며 거절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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