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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제비도 쉬었다 가는 고즈넉한 한옥 풍경

등록 2005-07-21 18:56수정 2006-02-06 20:40

헌책방 순례/대오서점
책방은 땅에 붙박혀 있다. 그런데 쫓아가서야 붙잡을 수 있는 책방도 있다.

종로구 누하동 대오서점(02-735-1349). 한옥 삐걱대문을 개조한 유리 여닫이문 위에 작고 초라한 간판은 자칫 지나치기 십상이다.

문을 열면 삐리리. ‘예’ 하는 대답이 들리면 주인이 있는 거고 반응이 없으면 외출 중이다. 주인 권오남(75) 할머니는 ‘가져갈 것도 없고 잃어버릴 것도 없어’ 잠그지 않는다.

두 사람이 들어서면 부비고 서야 할만큼 좁은 대문간 좌우, 야트막한 천장까지 책꽂이를 달았다. 넘친 책들은 양쪽 바닥에 조~금 쌓였다. 소설, 수필, 요리책, 만화책들. 한발짝 성큼 내디디면 문지방 너머 마당이다. 기역자 한옥. 문간 쪽과 건넌방 처마 밑에 책꽂이를 달아맸다. 안채 처마 밑 책꽂이는 천상 제비집이다. 책들은 대부분 철 지난 교과서와 참고서 또는 바랜 만화책. 비닐로 비가림 한 책더미에 낡은 사다리 두 개가 기대어 있다. 부엌 조리대 맞은 편, 기름이 튈까 비닐로 덮은 책더미 역시 찾지 않을 참고서다.

벽에 기댄 책들을 걷어내면 평범한 일반 가정집, 아주 사적인 공간. 무척 조심스럽다. 마당가 수도 옆에 빨랫돌. 장독대에 항아리 여나무 개. 스티로폼 흙상자에 주렁주렁 고추가 약이 올랐다. 화강암으로 마감한 얕은 봉당에 올라서면 자르르 판마루. 아들 또는 손주일 법한 사진이 문틀 위쪽에 걸렸다. 서까래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깨끗한 회칠이 주인할머니를 닮았다.

“버리지 않고 그냥 장식품으로 두는 거야. 책이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에 무릎관절 수술을 한 뒤 힘쓰는 일을 접었다. 고물상을 돌아다닐 수도 책을 나를 수도 없다. 이웃에서 책을 가져오거나, 참고서를 찾는 학생들이 차츰 잦아들어 이제는 거의 없다.

경기도 원당이 고향인 권 할머니가 책을 가까이한 것은 52년 전인 1953년, 군에서 갓 제대한 조대식 총각한테 시집오면서부터. 총각은 책방을 차려 색시와 자신의 이름 한자씩을 떼어 책방 이름을 지었다. 알콩달콩 한해 걸러 여섯남매를 낳아 길렀다. 그렇게 45년. 7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전문서적쪽은 뚝 떼어 팔고 문간방의 것만 남겨 8년째 혼자 꾸려왔다. 어깨 너머로 배워 그럭저럭 이어왔으나 이제는 가겟방에 이어 시어머니(작년 2월 작고)가 쓰던 방도 세를 주어 그 세로써 생활한다. 작년에 막내아들이 설악산, 제주도 구경을 시켜줘 평생 처음 집밖 나들이를 했다. 단양에서는 ‘시루에서 콩나물 올라오듯 올라오는’ 물안개도 구경했다. 요즘은 게이트볼에 재미를 붙여 해가 설핏하면 사직공원으로 간다.


1912년에 출간된 <사도행전 주석>이 ‘전통 헌책방’의 자취 속에 화석처럼 남아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출간되지 않은 책이거니, 잠자리 날개같은 기억이 저만치 얇아져 간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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