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신촌헌책방
신촌헌책방(02-3141-5843)은 책이 많다. 북아현동 추계예술대 앞에서 신촌으로 옮겨올 때 1t 트럭 열네 대 분량이었다. 지금은 더 늘어 책방인지 창고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100권이 들어오면 20~30권이 팔린다는 주인 오응(64)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책방으로 시작해 창고로 변하는 중이다.
30평 넓이의 이곳은 사방벽과 책꽂이에서 넘쳐난 책들이 책꽂이 위에, 바닥에 마구 쌓여있다. 최소한의 손길만 주기로 한 것인가, 책의 쌓임도 되는대로다.
이 책방은 신촌 버스정류장에서 동교동 쪽으로 10여m쯤에 난 골목으로 꺾어들면 바로다. 그러나 젊고 싱싱한 사람들이 북적이는 신촌로터리를 지나온 자한테는 진득하니 책등에 시선을 주기가 힘들다. 첨단 신상품의 집적장인 백화점을 거쳐왔다면 더욱 그럴 터이다.
백화점과 책방의 낙하공간에 존재하는 버스정류장은 책으로 향한 발길을 방해한다. 정류장은 이동의 시작점, 그 어름에서 볼 일이 끝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 자신을 태워갈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다. 어디선가 다가올, 혹은 막 떠나가려는 기득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무리진 사람들의 욕심덩어리를 헤쳐 지난다는 것이 영 어색하다.
상품의 현란함에 현혹된 눈은 이미 충분히 피로하여 2층 높이의 헌책방 간판에 시선을 주지 못한다. 거기다가 큰 길과 가까운 탓에 책방이 거리를 등지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그래서일 거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마치 흥신소나 전당포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계단을 사이로 책방과 마주보는 복덕방이 낯설고, 그 낯섦은 책방에서 다시 한번 뒤집히면서 증폭된다.
주인 오씨는 하품을 뻑뻑하고 있었고, 젊은 동업자 김창수(48)씨는 넓은 창턱에 누워 있었다. 실내등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 속의 책들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것은 아우성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것은 소리없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가나출판사) 낱권, 오래된 <가면극>(이두현, 한국가면극연구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소중한 책을 보여달라자 비로소 주인은 불룩한 비닐봉지를 내왔다. 그 안에는 해방 직후에 나온 시집과 소설(<청록집> <나비와 바다> <포도> <목화씨 뿌릴 때>)과 잡지 창간호(<민주조선> <조선민중> <괴기>)가 들어 있었다. 100만원, 70만원, 50만원, 20만원…. 가격을 말하는 오씨의 표정은 점점 부풀었다. 채규엽의 에스피 음반 <순풍에 돛달고> <권농가>도 있다면서 목록을 보여주었으나 가격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집에는 이보다 더 쎈 것 3천권쯤 있는데 팔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가격 너머의 책 구경은 복이라기보다 기이함에 가까웠다.
주인은 무더위에 힘겨운 땀을 흘렸고 책상에는 <된장의 달인들>(지오북)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연재헌책방 순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