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이태원 외국서점
이태원 외국서점(02-793-8249)은 지하철 6호선 녹사평 역에서 가깝다. 구름다리 건너 남산쪽 30m쯤. 문고판 책이 똑 고르게 뉘어 쌓인 게 꼭 타일벽 같다. 현대문학, 철학, 심리학, 과학, 그리고 어린이책 등. 역시 같은 크기 문고판은 가로로 뉘었고 그밖의 판형은 세로로 꽂혔다. 그러고 보니 책방도 꼭 문고판이다.
주인 최기웅(63)씨 뒤편에 73년에 발행된 제14종 고물 영업허가증이 액자 속에 걸렸다.
기지촌에서 책을 구해다가 명동, 청계천 헌책방에 겁나게 팔았어. 남은 것은 화신백화점 옆골목에서 노점을 벌렸어. 그게 1968년이여. 3년 뒤에 여기에 자리 잡았지.
영어책 없어서 못 팔았어. 셰익스피어, 까뮈를 만나면 횡재한 기분이었지. 구두, 양복, 단추, 안경, 귀금속 등 카탈로그가 돈이 됐어. 업체에서 그걸 참고해서 물건을 만들었어. 세계 기능경시 대회에서 한국인들 입상한 뒤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었어. 말하자면 나는 애국자야.
미군부대 쓰레기 하나도 안 버렸어. 음식찌꺼기는 꿀꿀이죽으로 만들어 남대문 시장에서 팔았어. 사람들이 줄서서 먹었지. 허기진 한국인들 영양보충시킨 구황식품이랄까. 책은 말이야. 배움에 허기진 사람들한테 ‘구황서적’이었어. 철원 운천 운산 판문점 김포 부산 군산 춘천… 안 가본 데가 없어. 그래서 딸 셋 키웠지. 요즘? 쪽박이라구. 미군부대에서는 전혀 책 안 나와. 80여군데 외국공관원들이 떠날 때 팔거나 주고 가는 게 대부분이야. 호텔에서 잡지나 포켓북이 좀 나오고… 무엇보다 부근에 경쟁 책방이 두 군데나 더 생겼어. 한군데는 외국인이 주인인데 책 빠꼼이야. 새책 싸게 들여와 팔고 무엇보다 환경이 좋아. 손님 다 뺏어갔어. 봐, 손님이 없잖아. 어쩌는 수 없지만 좁은 바닥에 외국인까지 끼여 돈 벌어나가니 한심하지 뭐. 걔들은 처음부터 돈 벌자 주의고, 나는 문화수입에 기여한다는 의무와 긍지가 있었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 큰 복덕방 뒤엔 미국 메이저가 있어. 한국인은 바지사장이고. 형편없는 영어강사들 많아. 술자리에서 낄낄대면서 학생들 성희롱한 얘기해. 돈은 중국, 동남아에 가서 쓰고 들어와. 그리고 한국문화 소개하는 출판사가 있는데 미국인이 사장이야. 빌딩도 있고. 한국인들 참 호구야.
미군들 독서열 대단해. 도서관 꽉꽉 차. 배낭 맨 외국인 십중팔구 책 들어있어. 한국인들 백에 하나? 여기 손님도 그래. 한국 학생, 교수 거의 없어. 사가도 한두 권? 인터넷으로 새책 산다쳐도 바꿔보고 처분해야 할 것 아닌가. 양서들은 문고판으로 만들어 휴대 쉽고, 가벼운 종이에 인쇄 선명해. 빛 반사도 안되고. 우리 출판사들 반성해야 돼.
얘기해준 대신 후계자 하나 구해줘. 영어 잘하고, 컴퓨터 할 줄 알고, 출판에 관심있는 사람으로. 다 넘겨줄 의향 있어.
언뜻 눈에 띄었던 책들. 딘 쿤츠, 존 그리샴, 제임스 미치너, 파울로 코엘로, 커트 보네것.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연재헌책방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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