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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주 사소한 골목의 끝

등록 2016-07-22 19:09수정 2016-07-22 19:22

[토요판] 이 주의 시인 - 이병률
여름 감기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모두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해변으로 걸어가게 하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무엇으로 이토록 삶에게
안내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식물이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 없이
햇빛도 없이
사람도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눈사람 여관> 수록-

아주 작은 일을 기록할 때는 문을 걸어 잠근다. 그 일이 사소하기도 해서이고 그러면서 그 일이 중대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결국 무용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를 적어내는 일은 그러하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일은 그래도 그렇지가 않은데 시를 적는 일은 그토록 그러하다.

그러니까 어느 해, 그해 여름밤. 어디선가 볼일을 보고 집으로 와도 되는 길에 에돌아 나는 당신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당신의 집이 있는 고갯길을 올라 당신이 지나는 길에 서서 공기를 한번 맡고 돌아오면 그나마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겠지. 담장의 잎들이 나를 내다보느라 고개를 빼들고 달빛도 나를 안내하느라 유난히 찢어진 눈을 하고 있던 밤. 당신이 사는 집이 어디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어렴풋하게나마 이 여러 갈래길 가운데 하나를 밟고 지날 것만 같았었지.

나는 그 골목에 서서 무엇에 집중을 했던 것일까.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려 전화기를 들여다보는데 하필이면 당신이 문자를 보낸 거였다. ‘혹시 이 근처에 있어요?’라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만으로는 말뜻이 정확하질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 전화기 불빛 때문에 붉어진 내 얼굴이 제대로 보였나 보다.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발소리.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집에 들어가던 당신이 어둑어둑한 골목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인지를 확인하려고 문자를 보낸 거였고 문자를 들여다보는 사이, 멀찌감치 나인지를 의심했던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었던 것.

아, 여기 사느냐고 내가 물었다. 나의 모른 척이 당신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나는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 겨우 당황하고 있었었겠지. 우리 인생에는 늘 이런 식의 우연을 가장한 축제가 있는 것이겠고. 사소하기도, 중대하기도, 무용하기도 한, 그 화사한 축제에 한눈이나 팔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고!

이 시에서 끊임없이 묻고 있는 바와 달리 내가 무엇으로 살아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묻고 묻는 중에 방향이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정도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울릉도에는(나는 지금 울릉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많이 보일 것 같은 그 무수한 별들이 안 보인다고 한다. 이 섬에는 이상할 정도로 뱀이 살지를 못하고, 이곳에서 많이 나는 더덕에서는 더덕 특유의 향내가 전혀 나질 않는다. 오늘 수백 명의 사람들은 풍랑 때문에 육지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들썩거리고, 거짓말을 하고 섬에 온 사람들은 파도 앞에 들통이 나버리고, 방금 전 내다본 숙소 창문 바깥에는 한 깡마른 사내가 방파제 앞에 오래 서서 하염없이 등짝을 보이고 있고…… 이 의문들, 이 낯설고 산란한 풍경들.

우리가 겨우 알고 있는 것들은 물론이려니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들까지도 열쇠로 채워진 채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무도 이 열쇠를 열 힘도 재간도 없다. 하지만 그 무력함 앞에 시는 꽃을 피우는지도. 그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전달된 체온에서 시의 무늬는 번지는지도. 이 얼마나 사소하기도, 중대하기도, 무용하기도 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두려움 앞에서 겁을 먹지 않으리라고 최소한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며, 남에게 미안해할 일은 멀리하자 자주 다짐하는 사람이며, 내가 쓰는 시는 비록 좋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시인으로서의 마음만큼은 언제나 좋은 상태로 유지하자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이다. 아, 나는 그만큼만이라도 채워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도. 일찍이 인간이 되려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지만 지금도 아예 늦은 것은 아니라고 뻔뻔히 위무한다. 그렇다고 이 당장의 위무만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따뜻함만으로는 살 수 없을 때 찬바람이 필요한 것을 알고, 밥만으로는 살 수 없을 때 어느 갈급한 먼 지점이 그리운 것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무엇으로 살겠다는 말인가.

이병률 시인
이병률 시인
무엇으로 살까 하는 물음의 끝자리에 언제나 시(詩)가 있었으니 다행이다. 어떤 욕심과 어떤 들뜸으로 나무 하나라도 뽑아치워야 할 것 같은 괜한 기운이 몸 안에 돌 때, 이상하게도 그렁그렁 가슴께에 맺히는 것은 늘 시였다.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지만, 그렇다 한들 우리는 이생을 그 무엇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병률 시인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을 냈다.


뼈아프다는 것

이병률의 시는 인생이 전적으로 ‘나’에게, 그러니까 ‘한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뼈아프게 아는 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살다’라는 뼈아픔의 공통 행위이자 감정을 통해 타인을 알아보고 위무한다. “나도 벼랑 끝에 살며 당신처럼 핏발의 냄새 풍긴 적 있기 때문이다”(‘벼랑을 달리네’).

알아보는 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무위와 무언의 알은체는 먹먹한 감동을 안겨준다. 누가 비로소 나를 알아봐줄 때의 안도감과, 나도 이해하지 못한 나의 감정이 해명될 때의 기쁜 통증. 작품이 독자의 자의식과 해석을 잠시 몰수하는 ‘몰입’의 상태다. 인간이 문학과 예술에 기대하는 행복은 ‘나’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잊는 것, 즉 작품에 몰입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고양(高揚)은 ‘나’를 지울 때, 상대에 녹아들어가 내가 잠시 사라질 때 생겨난다. 이해와는 별개의 일이다. 이병률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그의 시에 몰입하고, ‘나’를 잊고 ‘당신’에게 녹아든다. 그런 ‘나’를 떠나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하”지만.

‘인생’에 버금가는 거의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이병률에게 ‘사랑’은 인생의 가장 뼈아픈 부분이자, 인생의 번민과 상실이 압축되어 있는 전부다. 인생이 뼈아프다는 것. 사랑만큼이나 뼈아프다는 것. 둘은 자주 하나의 문제고,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긴밀한 관계라는 것. 이병률은 생애 최대의 난제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통해 다룬다. 감정은 현대시에서 지양해야 할 세련되지 못한 대상으로 취급되지만,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표명하는 가장 솔직하고 투명한 기제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병률은 감정의 맥락과 심연을 응시하면서, 한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감정들을 어찌할 수 없는 채로 언어화한다. 살아가며 사랑하는 존재인 인간은 감정을 통해 다른 존재를 들여다보고 알아보며, 자신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 극적인 사건이 ‘사랑’이다. 그리고 ‘시’는 사랑의 유의어거나 대체어다. “햇빛은 찬란하고 나를 둘 데가 없다// 시를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다”(‘대림동’). 얼마나 처절했는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당신’은 다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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