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없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리는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시집 <나는, 웃는다>(창비, 2006)
한겨울이다. 많은 것들이 입을 닫고 있다. 고라니도 입을 닫고 다람쥐도 입을 닫고 있다. 붕어도 잉어도 입을 닫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만 입을 열었다 닫을 뿐. 대다수의 것들이 다 침묵을 하고 있다. 나 사는 마을 뒷산 굴참나무도 그렇고 산벚나무도 그렇다.
겨우내 입을 닫고 있다가 봄이 오면 오만 것들이 다 펑펑 꽃을 피울 것이다. 수많은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주석 없이, 주석 없는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목단꽃도 그렇고 장미꽃도 그렇다. 탱자나무 꽃도 그렇다.
‘주석 없이’는 십년 전쯤에 쓴, 연애시다. 우리 동네 뒷산을 올라가는데 불쑥 써졌다. 체육공원이 있고 그 밑에 작은 밭뙈기 하나가 있는데, 그곳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갑자기 이 시가 나한테 찾아왔다.
연애, 연애시라고 했지만 실은 시론을 얘기한 시다.
주석은 낱말이나 문장을 쉽게 풀이함을 말한다. 본문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래쪽에 따로 달아 놓은 풀이를 말하는 각주와는 다르다. 본문의 뜻을 주로 달아 알기 쉽게 풀이한 주해와도 다르다. 여하튼 나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싫어한다. ‘풀이’라는 말에는 골치 아픈 인문(人文)의 냄새가 배어 있다.
주석이나 각주나 주해나 다 문자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생겨난 것. 문명이 낳은 결과다. 나는 무식하다. 나는 무식하게 살아왔다. 나한테 그것들은 다 골치 아픈 그 무엇일 뿐. 나는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들을 싫어한다. 나는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문맹’)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나는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물고기를 잘 잡는다. 산나물을 잘 캔다. 길을 가다가도 개울을 만나면 저기 어디쯤에 고기가 있을지 없을지를 안다. 산나물이 많을지 적을지를 잘 안다. 나는 본능으로 판단하는 사람.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아무래도 나는 문자 이전, 설명 이전의 세계를 좋아하는가 보다.
나는 시인은, 타고난다고 믿는다.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시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주석이 없으면, 각주가 없으면 읽기 힘든 시들이 있는데 그런 시들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책을 읽어야만, 다른 시를 읽어야만 쓰는 시인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연관어나 연동어가 없으면 읽을 수 없는 글도 싫어한다. 이제 완전한 단독자인 글쟁이들은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나도 안다. 연동(聯動)하지 않으면 이 시대의 시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연동하는 능력, 그것만이 이 시대 시인의 덕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쓰지 않으련다. 그 덕목, 그 능력을 거부하려고 한다.
지하철을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죄다 손에 쥐고 있는 납작하고 얇고 가벼운 스마트폰, 그렇다. 이 시대의 주석은 어김없이 이 기계의 검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므로 검색과 주석은 이 시대의 동의어다. 손가락 몇 번을 움직이면 수없이 쏟아지는 주석들…. 이제 우리는 이 주석 없이는 못 산다. 이 주석에 의지해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한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게 우리를 ‘주석 없이’는 판단도 결정도 하지 못하는 멍텅구리로 만들어버렸다.
시를 써 오면서 내가 끝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물고기 잡는 능력, 산나물 캐는 능력이다. 나는 이 능력이 끝까지 내 몸에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 안 하고 산비탈로 강여울로 헤매 다닌다. 머리가 아니라,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시와 삶을 기억하고 반응하기를 바란다.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다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고 시를 읽고 쓰는 방법이다. 나는 무식하다. 나는 지식이 아닌 본능, 직관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참 좋다.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를 냈다. 이형기문학상, 시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단 1초, 직관에 필요한 모든 시간
직관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일이 아니다. 마음으로, 온몸으로, 존재 전체로 세계를 파고드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단박에 이해하는 능력이다. 직관하는 눈은 심안(心眼)이며 혜안(慧眼)이다. 사물의 이치를 꿰뚫는 천리안(千里眼)이나, 불법의 바른 이치를 통찰하는 법안(法眼)은 직관의 최상급에 속한다.
유홍준은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직관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직관하는 자다. 직관의 뿌리는 본능이다. 시인은 지식을 배우고 생각해서 아는 자가 아니라, 보거나 듣는 즉시 깨닫는 자여야 한다. 마음으로, 온몸으로, 존재 전체로 어떤 것을 알아보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1초. 물리적인 시간 1초이자, ‘압도적인 한순간’을 뜻하는 상징의 1초다.
시도, 삶도 이 예외적인 1초들을 통해 극점에 도달한다. 더할 수 없이 황홀하고, 깊고, 자유롭고, 처절한 등등의 극점들. 가령, ‘당신’을 알아보는 데 1초가 걸렸다. 당신을 알아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는 데 1초가 걸렸다. 삶의 숱한 징후들과 거대한 흐름과 반역하는 의지들, “생(生)이 어디서부터 타들어가는지 알아”(‘흘러내리는 얼굴’)채는 데 필요했던 시간도 1초였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본질을 향해 곧장 내리꽂혔던 직각(直覺)의 순간들.
직관은, 존재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데이터로 환산하고 연결하는 시대에 시인이 ‘최후의 자연-인간’으로 굳게 남아 지켜야 할 능력이다. 유홍준의 경험적인 증언과 믿음에 의하면, 물고기 잡는 능력과 산나물 캐는 능력이 곧 시를 쓰는 능력이며 인간과 세계를 관통하는 능력이다. 유홍준의 야생의 시론은 인간이 지닌 가장 오래된 능력, 가장 길들여지지 않은 능력에서 시의 현재와 미래를 본다. 시의 현재와 미래는 곧 인간의 현재와 미래다. 인간과 세계를 1초 만에 직관하는 능력,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언어를 통해 언어 이상으로 표현해 온 노력을 우리는 시라고 불러왔다. 어떤 가치 있는 것들도 지켜낼 때만이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시 역시 그렇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