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시
▶ <한겨레>는 2016년 1월9일부터 2017년 1월7일까지 매주 두 면씩 시를 연재했습니다. 한 주 동안 휘몰아치는 속도에 떠밀린 독자들이 잠시 손 뻗어 붙잡을 수 있는 몇 포기의 푸른 풀이 되고 싶었습니다. 2016년은 어느 해보다 빡빡하고 뻑뻑했습니다. 많은 울음이 있었고 큰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 빡빡하고 뻑뻑한 시간의 틈을 벌리며 시가 싸워 주길 바랐습니다. 여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열해서 내는 것이었습니다. 토요판의 시어들이 울음과 분노 사이에서 좁고 흐린 숨길 하나 놓았길 소망합니다. 1년간 시인 49명의 시를 실었고, 그들이 스스로의 시를 이야기했습니다. 시를 아끼는 같은 수의 필자들이 자신의 곁이 돼준 시들을 나눴습니다. 어떤 시는 이불처럼 포근했고, 어떤 시는 칼보다 날카로웠습니다. 어떤 시는 청량했고, 어떤 시는 비릿했으며, 어떤 시는 차가웠고, 어떤 시는 뜨거웠습니다. 서로 다른 감각의 시들이, 앞으로도, 그대 옆에, 서로 다른 온도로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이주의 시인’ 47명의 글(‘나의 시를 말한다’)에서 시와, 시 쓰기와, 시로 담아낸 삶에 관한 문장들을 건져 ‘마지막 시편’으로 띄웁니다. 지난해 말 문단 성폭력 사태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남성 시인 2명의 문장은 제외했습니다. ‘이주의 시인’ 선정위원(황현산·김수이·손택수·이영광)으로 활동해 주신 손택수 시인이 지난 일 년의 지면을 갈무리하며 ‘이 시대 시인의 초상’을 점묘했습니다. <한겨레> 토요판은 빡빡하고 뻑뻑한 세계에 여백을 틔우는 언어들을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끝>
절집 음식처럼 담백한 여백으로
존중과 개성들의 소통 바라며
당대의 팍팍한 삶 닿고자 경청 시가 미를 무기로 권력화될 때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도 경험
시도 시인도 백지 앞에 설 때
겨우 가난한 마음을 되새김질 하염없음! 그렇다. 하염없음의 역학은 ‘나는 너다’가 아니라 ‘나는 너가 아니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저버릴 수 없다’에 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슬픔이었고, 또 누군가에게 그것은 균열의 어질머리였고, 부재와 결핍과 상실의 감각이었으며 불가능한 세계를 향한 그리움으로 나타났다. 그 어떤 경우든 부끄러움과 통증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사랑은 치욕과 통증의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는 행위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들과의 교감 방식으로서 가사를 소개한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은 혹시 있을지 모를 지면의 성격이 지닌 중력에 경쾌한 탄력을, 동서양의 고전과 당대의 시들을 종횡무진한 신형철의 ‘격주시화’는 시 공부를 오늘의 삶과 핍진하게 연동시키는 순발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문학장 내외의 인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나의 시’ 중 박유리 기자가 직접 번역 소개한 무명의 시리아 난민 소년의 자작시 ‘심장의 귀환’이 남긴 뜨거운 감동을 우리는 쉬 잊질 못하고 있다. “인간 괴물에 먹힌 심장이 사방에 흩어지고/ 우리의 땅은 싸움터가 되었다/ 어디서나 인간을 먹는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심장의 박동 소리를 잊지 않는 소년의 노래는 우리 시대 시의 귀환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그 어떤 시인의 시 못지않은 절박함으로 들려주었다. 기자가 난민 캠프에서 만난 소년의 시는 이문재 시인이 소개한 아우슈비츠의 티타임 에피소드와 겹친다. 몇 번 우려낸 형편없는 차였지만 티타임이 오면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드물게 찻물을 남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들이 있었다. 귀한 찻물로 동물적 욕망을 해소하지 않고 얼굴을 씻는 데 썼다는 것은 현실의 궁핍을 외면한 철부지의 낭비나 사치로 비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전 뒤 두 부류의 생존율을 따져 보았더니 놀랍게도 후자 쪽이 몇 배 이상 더 높았다고 한다. 시인은 찻물을 남겨 자기 얼굴을 씻는 행위를 자기성찰, 즉 시로 해석한다. 자성은 시와 시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시가 인류사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장르 못지않게 자성의 능력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연재 기간에 일어났던 남성 시인들의 성폭력을 우리는 기억하고자 한다. 시가 미를 무기로 하여 권력화되었을 때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를 우리는 뼈아픈 고통으로 지켜보았다. ‘불교승들은 숲을 지날 때 조그만 방울을 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감동받았어요. 자기가 밟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선 아무 생각 없이 달팽이나 벌레를 함부로 밟아버리거든요.’ 히틀러 밑에서 내무장관을 지낸 하인리히 힘러의 말이다. 누가 이것을 살인마의 말이라 할 것인가. 시라고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실린 시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죽어간 청년을 망각하게 하고,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 파괴되어가는 숲의 신음에 귀를 막고, 양계장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산란기계가 되어버린 닭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도구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고자 한다. 그리하여 다시, 여백이다. 시도 시인도 백지 앞에서 겨우 가난한 마음을 되새김질한다. 백지의 찬물에 얼굴을 씻고, 백지 속에서 점점 희박해가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는다. 백석의 백지는 ‘흰 바람벽’이었다. 우주사적 고독으로 뼈만 남은 그는 이렇게 썼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고. 뼈아픈 문장이다. ‘넘치는 사랑과 슬픔’을 갑골문으로 한 이 지면 또한 이제 침묵할 때다. 더 많은 시와 시인들을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에 미련이 없을 리 없으나, 누가 그랬던가, 멈춤을 통해 우리는 춤이 된다고. 손택수 시인·‘이주의 시인’ 선정위원
시인이 남긴 말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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