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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과학이 증발시킨 것

등록 2017-01-06 19:52수정 2017-01-06 22:23

[토요판] 현기영의 시
한혈마(汗血馬)  뉴한(牛漢)

고비사막 천리를 달려야 물길이 있네
천릿길 황야를 달려야 초원이 있네

바람 한점 없는 칠팔월
고비사막은 불의 땅
오직 나는 듯이 달려야
네 다리로 하늘을 오를 듯이 달려야
가슴으로 바람결을 느끼고
수백리 뜨겁게 날리는 흙먼지를 지날 수 있네

땀은 메마른 모래 먼지가 핥아버리네
땀의 결정結晶은 말의 흰 점이 되네

땀을 모두 흘려버리고
담즙을 다 흘려버리고
텅 빈 광야를 향해 질주하는 눈빛
실하게 뛰노는 가슴근육
자기 생명의 내부를 향해 말없는 도움을 청하고
어깨와 둔부로부터
방울방울 구슬 같은 피를 흘리니
세상에는
오직 한혈마만이
혈관과 땀샘이 서로 통하네

어깨 위에 날개는 없네
발굽에서도 바람 일지 않네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화를 한혈마는 알지 못하네
그저 앞을 향해 내달릴 뿐이네
온몸이 붉은 구름 같은 혈기를 내뿜으며
눈에 막힌 비탈

얼어붙은 하늘을 뛰어넘으려고
쉴 새 없이 생명을 불사른다네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흘려버리고
근육과 뼈대로 천리를 더 날아달리는

한혈마
생명의 정점 위에 쓰러져
눈처럼 하얀
꽃송이로 타오르는

어린 시절에 사귄 여자아이와 말은 평생 그 남자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생생한 인상을 남긴다는데, 나에게도 강한 건초 냄새와 함께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외할아버지가 짐말로 부리던 암말이었다. 중학생 시절, 외갓집에 얹혀살았던 나는 틈틈이 풀 뜯기고 물 먹이러 다니면서 말을 돌보곤 했다. 모색은 윤기 흐르는 아름다운 다갈색이고 이마에서 콧등까지 일직선으로 하얀 털이 나 있어서, 지나가던 사람이 한번 더 뒤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말이었다.

잘생긴 말이 지닌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여성적 우아스러움인 것 같다. 서 있는 자태도 겅정겅정 걸어가는 모습도 우아하다. 슬픔을 품은 듯한 큰 눈망울과 우아하게 긴 목, 그 긴 목과 머리를 덮은 풍성한 검은 갈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으로 크고 펑퍼짐한 궁둥이가 여성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 그려진 백마도(百馬圖)들 중에는 말의 눈에 있지도 않은 아랫눈썹을 그려 넣어 인간 여성처럼 보이게 만든 그림도 있다.

말이 날씬해 보이는 것은 발목이 가늘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사람도 발목이 가늘어야 진짜 미인이라고 할 수 있고, 말처럼 달리기도 잘한다. 말의 가는 발목에는 질주 본능이 장착되어 있다. 서 있는 말보다 질주하는 말이 더 아름답다. 날파람 일으키며, 흙먼지 구름 일으키며 질주하는 말을 상상해 보자.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풍성한 갈기털이 바람에 휘날리고, 말총 꼬리는 수평으로 허공에 뜬다. 그리고 마상의 한 인간, 언월청룡도를 비껴들고 죽창 끝처럼 뾰죽한 말의 두 귀 위로 몸을 굽히고 전방을 노려보는 관운장, 말갈기에 뒤섞여 보기 좋게 휘날리는 그의 푸짐한 구레나룻도 상상해 보자.

현기영 소설가
현기영 소설가
전시대에는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지방 곳곳에 역참을 두었는데, 역참과 역참 사이 백리(40㎞)를 파발마가 달렸다. 말이 백리를 달리면, 입에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로 지치게 마련이어서, 다른 말로 바꿔 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하루에 천리 달리는 천리마가 있다고 했다. 한나라 무제 때 서역에서 사막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에 전해진 그 말은 피 같은 땀을 흘리면서 천리를 달린다 해서 그 이름이 한혈마(汗血馬)였다. 네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나는 듯이 달리는데, 날아가는 제비를 밟을 정도로 빠르다고, 시인들은 칭송했다. 이는 물론 과장된 표현이고 ‘천리마’라는 것도 과장이지만, 어떤 품종보다도 월등히 빠르고 좀처럼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이 이 말이다. 관운장이 탔던 적토마도 한혈마였다고 한다. 붉은 피 섞인 땀을 흘리면서 하루에 천리 간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초월적 신비감을 주어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 천년의 신비가 최근에 과학에 의해 벗겨졌다. 말의 뒷목과 어깨 사이의 피하조직에 기생충이 서식하는데, 달릴 때면 그 부위의 혈관이 늘어나 땀과 함께 피가 흘러내린다는 것이다. 우주선 아폴로 이후 달은 시적 낭만을 잃은 맹숭한 물체가 되어 버렸듯이, 과학은 한혈마에서 한혈(汗血)을 증발시켜 버렸다.

현기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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