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 백서 이문재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중략)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중략)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지난 5월은 우리에게 추모와 기억의 달이었다. 5월17일 이후의 전철 강남역과 28일 이후의 전철 구의역에 나붙은 추모의 글들은 수천장에 달한다. 강남역에는 1천장이 넘는 포스트잇이, 구의역에는 2천장 가까운 메시지들이 나붙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연민, 애도, 분노의 메시지들을 사건 현장에, 혹은 현장 가까운 역사 벽면에 갖다 붙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어떤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이 그 메시지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한 장 한 장 일일이 사진 채록했다는데, 그 작업은 우리의 상처와 상실의 기억을 보존하고 공유하려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기록해야 할 사회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5월은 또 우리에게 ‘물음표의 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천장의 포스트잇들에 담긴 연민과 노여움의 표현들을 바닥에서 관통하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한 통렬한 물음들이다.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사람들의 목숨이 운과 우연에 좌우되는 사회는 사회인가? 부당한 힘들에 의한 불평등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회인가?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사회는 사회인가? 이런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언제까지 이런 꼴로 살아야 하는가? 변화의 희망은 있는가? 변화는 가능한가, 어떻게?
희망이라?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 한 대목이 생각난다. “역사는 말한다, 희망을 갖지 말라/ 무덤의 이쪽에서는./ 그러나 일생에 한번쯤/ 오래 기다리던 정의의 파도는 일어나고/ 희망과 역사가 운을 맞춘다.”(시극 <트로이에서의 치유>)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역사 속에서도 희망의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정의의 파도가 일어나면 희망과 역사가 서로 손잡고 춤춘다. 그것이 변화와 구원의 순간이다. 우리에게도 드물게 희망을 노래한 시들이 좀 있다. 이문재 ‘손의 백서’는 그런 시의 하나다. (원문이 좀 길어서 시인의 승낙을 받아 일부 대목만 발췌했다.) 계산과 타산, 증오와 혐오, 멸시와 소외가 삶을 토막 내고 고립시킨 것이 이 시대의 곤경이다. 이 곤경을 뚫고 나갈 방법은 사람이 사람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고집스레 남아 있기로 한다는 것이다. 연대의 끈과 연결의 불꽃이 필요하다. 그 끈과 불꽃이 나의 안팎을 연결하고 나와 타인을, 서로 다른 삶들을, 외로운 노래와 잘린 이야기들을, 시대의 희망들을 연결한다. 이문재의 시는 삶이 형편없이 찢어져나간 시대에 사람들의 가슴을 이어붙일 ‘연결의 손’에 대한 기도이다.
시는 노래한다. 기도할 때 우리가 두 손을 모으는 것은 그래야만 내가 나를 모을 수 있고 가슴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고 신이 있는 곳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손이 만나는 ‘합장’으로부터
신성한 사원 한 채가, 그 사원의 불꽃이, 신의 거처가 출현한다. 신은 누구인가? 그는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을, 우리가 멸시해온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다. 그는 손과 손의 만남으로부터, 손이 다른 손들을 잡는 순간에 탄생한다. 이것이 손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이 시대 삶의 곤경을 뚫고 나갈 궁극적인 힘과 희망의 기원이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