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여장 사나이의 비애

등록 2016-07-29 20:42수정 2016-07-29 20:58

[토요판] 김명곤의 시
남사당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야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람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소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1998년에 남사당을 소재로 한 연극 <유랑의 노래>를 쓰고 연출하여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그 희곡을 쓰는 동안 1940년에 발표된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은 나에게 가장 핵심적인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꼭두쇠’라고 불리는 우두머리를 비롯하여 40~50명으로 구성된 놀이패인 남사당은 방방곡곡을 떠돌며 노래와 춤을 팔고 살던 사내들의 집단인데, 그 무렵에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전통 연희이다. 어린 시절에 아들 보기를 소망했던 부모 때문에 남장을 해야 했던 시인 자신의 수치심이 시를 쓴 동기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거꾸로 여장을 하고 다니는 사나이의 비애와 떠돌이 인생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인 ‘나’는, 풀줄기로 엮은 갓인 ‘초립’을 쓰고 등솔기가 허리께까지 틔고 두루마기처럼 긴 ‘쾌자’를 입은 남사당 단원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향단이처럼 치마저고리를 입고 여자 목소리를 내느라 그의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남사당의 운명인 걸 어쩌랴. 그 무렵에 유행한 ‘유랑 극단’(작사 유도순, 작곡 전기현)이란 노래에는 유랑 인생의 애환이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분장한 무대 우에/ 화려한 생활 외롭다/ 화로불 포장 속에/ 맺는 꿈을 뉘 알소냐/ 눈물로 바라는 고향을/ 못 찾어 갈 그 운명”

어쩌다 그런 운명이 되었는지 저마다 사연도 기구하지만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를 만났을 때, 사랑을 속삭이지도 못하고 짐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새벽에 동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때면 너무도 서글퍼 신세 한탄이 나올 법도 하다. 아련한 정을 남기고 애환 서린 새벽길을 떠나는 남사당 떠돌이 사내의 마음이 아리게 다가오는 시이다. 감상에 흐르기 쉬운 소재임에도 절제된 언어를 통해 토속적 정서가 어우러진 서정성과 소박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사슴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에 비유한 시로 유명한 노천명은 그 입에서 마치 보석과 꽃을 토하는 것 같다는 칭송을 들을 만큼 우리말의 구사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를 절제된 시어로 표현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개척했다. 그러나 식민치하에서 태평양 전쟁 중에 전쟁을 찬양하는 시들을 쓴 것과, 한국전쟁 때 월북 작가들이 주도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가 부역죄로 체포되어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사면으로 풀려난 점 등은
시인의 내적 세계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질되거나 파괴된 예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으로서 시대와 불화한 삶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고통을 안겨 주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50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그녀가 남긴 시들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도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김명곤 세종문화회관 이사장·배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