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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디지털만 보는 ‘책맹’ 시대, 아름다운 책으로 버틸 것”

등록 2016-08-04 19:14수정 2016-08-04 19:26

한국의 장수 출판사들 (2)
인터뷰, 창립 40년 한길사 김언호 대표
“스마트폰 등 디지털 매체가 종이책의 깊이를 대체할 순 없다.” 7월 29일 파주 출판도시 내의 한길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언호 대표. 파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스마트폰 등 디지털 매체가 종이책의 깊이를 대체할 순 없다.” 7월 29일 파주 출판도시 내의 한길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언호 대표. 파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제2의 리영희나 함석헌’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책은 하루아침에 출간되지 않는다.”

한국 인문·사회 분야 대표 출판사 중 하나인 한길사 김언호(72) 대표는 한탄하듯 말했다. 올해로 창립 40년을 넘긴 한길사를 꾸려온 그는 1980년대 이른바 ‘한국 출판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길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한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 <태백산맥> <혼불> <한국사> <로마인 이야기>, ‘그레이트 북스’ 등 굵직한 대작들로 한국 사회의 대전환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그는 “출판사·출판인들이 좋은 책을 내는 건 본능”이라면서도 “시장이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 시대가 돼버린 듯하다”고 말했다. 그 주요한 이유로 글로벌화와 함께 진행된 디지털화를 들었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화는 그 정도가 유난스럽다. 구미 사회도 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대책 없이 진행되진 않는다. 스마트폰만으로는 깊은 내용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불가능하다. 정부 정책도 포퓰리즘에 사로잡혀 모든 걸 산업적·경제적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천 콘텐츠’인 종이책을 홀대해선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어릴 때부터 종이책 읽는 훈련을 받아야 전자책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문맹’은 없지만 호흡이 긴 책을 읽을 수 없는 ‘책맹’들이 늘고 있다. 종이책의 아날로그적 가치를 깨부수는 디지털화로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최근 서구의 서점들을 둘러본 그는 구미에서는 인터넷서점이나 전자책의 팽창이 정점을 찍고 종이책과 독립서점들이 오히려 늘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과 서점을 확보하는 건 국가의 의무다. 개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출판과 도서관, 서점은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문화 인프라이고, 기본권으로서의 ‘독서복지권’을 확립해야 한다.”

책을 더 읽는 인프라를 구축하기는커녕, 정부는 공공도서관 예산을 오히려 줄여왔다. 2014년 전국 930개 공공도서관 예산은 총 604억원, 이듬해인 2015년에는 550억원으로 54억원이나 깎았다. 새 도서정가제를 고려하면, 공공도서관의 장서 구입력은 전해에 견줘 3분의 1가량 줄어들었다는 것이 출판계의 분석이다. 김 대표는 “디지털 콘텐츠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사회 추세를 바로잡는 데 출판인들이 연대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80년대 ‘한국 책 르네상스’ 경험
‘한길그레이트북스’ 매출 30% 차지
“국민 기본권으로서 ‘독서복지’ 필요”

김 대표는 1976년에 한길사를 시작하기 1년 전, 1968년부터 다니던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1975년 자유언론실천운동 한복판에 그도 서 있었다. 지금껏 그의 화두는 줄곧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언론인 송건호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고은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등이 줄줄이 나온 1980년대 “책의 시대”는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역사상 드문 ‘문화혁명 시대’였고, 한길사의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는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기획물이었다. 1979년 말에 출간된 뒤 판금당했다가 19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재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제1권도 그 신서 11번째 책이었다. “5천부는 나가지 않겠느냐”고 했던 <해전사>는 1989년에 나온 제6권까지 모두 약 40만부가 팔렸다. 그 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맞대응으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해전사’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로 통칭되는 한국 사회 변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함석헌 전집 20권, 27권짜리 <한국사>, 22권짜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 그리고 이오덕, 강만길, 안병무, 이삼성, 임철규 등 당대 진보적 지식인이 망라된 신서들과 무크지 <한국사회 연구> <제3세계> 등도 다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 책들은, 경남 밀양군 하남면 시골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이후 부산 보수동과 서울 청계천 헌책방들을 뒤지고 다닌 ‘책벌레’ 김언호 자신이 읽고 싶었던 책들이다. “책은 시대의 소산”이라는 그에게 출판사는 “책공장이 아닌 사회문화학교”였다. 한길 역사강좌, 사회과학 강좌, 역사기행, 문학기행, 독서토론회 등 저자와 독자들을 직접 만나게 한 기획들도 해나갔다. 파주 출판도시와 헤이리 예술인마을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도 시대적 요구와 얽혀 있다고 그는 말했다.

1996년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해 7월 말 현재 147권까지 나온 ‘한길 그레이트 북스’는 지금 출판사 매출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그중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가 4만부로 가장 많이 나갔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만7천부) <인간의 조건>(2만2천부),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2만2천부) <제국의 시대>(1만5천부), 그리고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등도 1만부 이상씩 팔렸단다. 연간 5~7권씩 나오는 이 시리즈는 200권까지 채울 생각이다. 기대되는 출간 예정 국내서 가운데는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제3권, 함석헌 관련 저작들이 눈에 띈다.

한길사의 책들이 너무 무겁다거나 시대 흐름에 무감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들에, 그는 “유념하겠지만 ‘인문주의’라는 기본은 버릴 수 없다”며 “그런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앞으론 스토리가 있는 문학 쪽에 좀더 힘을 쏟겠다”고 답했다.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등 ‘나폴리 4부작’이 그래서 나왔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책을 잘 만드는 일이다. 책 만들기 40년을 넘기면서 더 좋은 책, 더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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