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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선조의 책 사랑방 전통 이은 “책다운 책” 만들기 50년

등록 2016-10-20 20:37수정 2016-10-20 22:51

한국의 장수 출판사들 (7)
이기웅 열화당 대표


  17일 열화당 창사 45돌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책박물관에서. 뒷줄 왼쪽부터 조윤형 편집실장, 임원규 영업관리 팀장, 이기웅 대표, 박미 편집실 팀장, 조민지 편집자. 앞줄 왼쪽부터 이수정 기획실장, 정혜경 책박물관 학예사. 이 자리에 송선미 영업관리 차장, 김남희 주임, 박소영 편집 디자이너는 함께하지 못했다.  김명진 기자 <A href="mailto:littleprince@hani.co.kr">littleprince@hani.co.kr</A>
17일 열화당 창사 45돌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책박물관에서. 뒷줄 왼쪽부터 조윤형 편집실장, 임원규 영업관리 팀장, 이기웅 대표, 박미 편집실 팀장, 조민지 편집자. 앞줄 왼쪽부터 이수정 기획실장, 정혜경 책박물관 학예사. 이 자리에 송선미 영업관리 차장, 김남희 주임, 박소영 편집 디자이너는 함께하지 못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예전 일본에 갔을 때, 마중 나온 이와나미 출판사 직원이 더듬거리는 우리말로 ‘한국은 어딜 가나 예술품들이 널려 있는 미술의 나라인데 왜 미술책이 없느냐’는거야. 당시 악보를 비롯한 음악관련 책들은 판매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미술책은 없었어. 미술 문고 제대로 해야겠다 마음먹었지.”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미술서적 출판계에 1970년대 초 열화당이 맨 먼저 착수한 미술문고(구판)는 전문가나 미술학도들이 아닌 일반 독자들을 겨냥했다. “오프셋 인쇄로 정말 어렵게 작업했어. 고흐, 고갱, 피카소, 미켈란젤로 등 10권을 권당 50부씩 찍어 현대화랑에 갖다 놨는데, 지금 보면 볼품없지만 그땐 그게 하루만에 다 나가버렸어. 불안했어. 그렇게 일사천리로 가면 난 불안해져. 당시 평론가들이 꾸린 ’현실과 발언’팀이 집필을 맡았는데, 첫 권 <미켈란젤로>를 최민이, 김윤수는 <오귀스트 로댕>을 썼어.”

50년을 출판일에 종사해 온 이기웅(76) 열화당 대표는 “책은 내 운명이자 삶의 일부”라고 했다. “옛부터 책은 필수품이지 장식품이 아니었어. 마치 피부나 머리카락, 입술 같은 것이지.” 출판인들이 으레 하는 얘기일 수 있지만, “강릉 선교장에서 태어나 댓살 때부터 열화당의 수천 권 책들과 수두룩했던 탁자, 궤, 연적들을 보고 책 심부름을 하며 자랐다”는 이 대표의 경우는 좀 다르다.

300여년 전 영조 때 효령대군 후손이 강릉 경포대 인근에 짓기 시작한 아흔아홉칸 선교장(船橋莊)은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이름난 사대부 고택이다. 예전 경포호를 배 타고 건넌 ‘배다리 마을’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 이 대표는 “선교장이라는 거대한 장원의 사랑채요 일종의 도서관이 바로 열화당(悅話堂)”이라고 했다. “200년 전인 1815년(순조 15년) 5대조가 동네 어귀에 활래정을 짓고 이어서 안쪽에 열화당을 지은 게 선교장 역사에서 화룡점정이었지. 선교장은 영동지방 유가의 본산이었어. 특히 수천 권의 서책을 갖춰 놓고 문집과 족보를 찍어내고 필사했던 열화당은 영동지방 선비들이나 과객들이 기거하고 묵었던 중요한 지역 문화공간이었어. 말하자면 사회적 기능까지 수행했던 그 공간이 내게 방향을 제시해 준거지.”

출판사 이름이 거기서 나왔다. 원래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의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따온 것인데,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의미를 지녔단다. 이 대표가 “책다운 책, 그 자체로 최상의 작품”을 지향하며 정성 들여 책을 만드는 한편으로 1980년대 후반 파주 출판도시 건설을 주도하고 거기에 지은 열화당 사옥을 도서관+책방 개념의 책박물관으로 조성한 것도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던 지식과 문화공간으로서의 옛 열화당이 제시했던 방향에 충실히 따른 셈이다.

창사 45돌 맞은 미술·전통문화 전문 열화당
“우리 시대를 담아내고 이끌어 가는 책” 목표
연말까지 특별전 ‘마흔다섯 해의 자화상’도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한 이 대표는 1966년,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던 일지사에 공채로 들어가 편집장 겸 업무부장에 전무까지 하며 경험을 쌓은 뒤 일지사쪽 권유로 1971년 열화당을 등록했다. 그러니 올해가 창사 45돌이다. 일지사에서 나와 청진동에 따로 사무실을 차린 건 1975년.

연건평 약 500평짜리 건물 두 채로 구성된 열화당 사옥의 책박물관은 창사 기념일인 지난 7월 2일부터 지금까지 800여 종에 이르는 열화당의 책들로 꾸민 ‘마흔다섯 해의 자화상’ 특별전을 열고 있다(연말까지). 전시회장인 책박물관은 1980년 이후에 나온 책들을 전시하는 제1 전시실과 그 이전 동서양 ‘옛책’들로 꾸며진 제2 전시실이 있는데, 각각 1·2 두 개 층이 서로 연결된 이 공간이 소장하고 있는 동서고금의 책은 약 4만권. “박물관을 위해 내가 책들을 모아왔는데, 소문을 듣고 저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책을 기증해줬어.”

열화당은 외관도 매력적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수많은 책들과 어우러진 내부 전시실이 “환상적”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측면 벽들은 상설 전시 공간이고 바닥면은 미술작품집이나 사진집을 비롯한 테마별 책 기획전시, 그리고 행사장으로 쓰인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볼 수 있는 라운지도 있다.

이 대표는 “우리(출판사)는 돈을 목표로 한 일반 기업이 아니다”고 했다. 시장경제체제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책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시장에 좌우되거나 그 눈치를 보는 기획, 출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출판은 고성장·고수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장이 아니라 지적 생산자인 저자와 수요자인 독자의 교류와 발전을 위한 터전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영혼을 품고 태어난 예술작품”으로서의 책, “우리 시대를 담아내고 이끌어 가는 책”, “한국문화의 미래를 떠받치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미술과 사진 등 시각매체, 한국전통문화 분야 책들을 주로 내온 열화당. 가장 비중이 큰 미술 분야에선 19세기 말과 20세기 주요 미술운동을 다룬 현대미술운동 총서와 미술선서, 미술책방 등의 많은 기획 단행본들을 출간했다. 미술·사회비평가요 사진이론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바실리 칸딘스키의 <점·선·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지오 폰티의 <건축 예찬>, 하싼 화티의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 등은 스테디셀러들이다. 그리고 사진문고 시리즈, <한국 악기> <서원> <경주남산>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등의 전통분야, 최근 쇄를 거듭하는 김영석 전 이탈리아 대사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그리고 이성복 시집 <어둠 속의 시> 등 인문 분야 책들, <루브르 만화 컬렉션> 등도 열화당이 자랑하는 책들이다.

연간 15~20권의 책을 내는 열화당 직원은 이 대표 외에 9명, 그 중 5명이 편집·디자인 담당이다. 한자 사용과 세로쓰기 등 “너무 쉽게 폐기해버린” 전통의 창조적 재활용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이 대표는 “열화당은 내 개인 재산이 아니다. 오래 일해온 직원들이 함께 꾸려가고 공유하는 일종의 가업(家業) 같은 것”이라며 “열화당을 지키는 이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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