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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등록 2016-08-05 19:25수정 2016-08-05 19:36

[토요판] 정연순의 시
원장면들 이성복

어느 날 당신은 벌겋게 익은 수박 속을 숟가락으로 파먹다가 갑자기 그 수박을 길러낸 식물 (그걸 수박풀이라 해야 되나, 수박나무라 해야 되나), 그저 잔가시가 촘촘히 붙은 뻣센 넝쿨과 호박잎을 닮은 잎새 몇 장으로 땅바닥을 기는 그 식물이 불쌍하게 생각된 적은 없는지. 여름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땅속 깊이 주둥이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길어 올려 벌건 과즙으로 됫박만한 수박통을 가득 채운 끈기와 정성은 대체 어디서 전수받았으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단지 쥐똥만한 제 씨알들을 멀리 날라줄지도 모를 낯선 것들에 대한 대접으로는 도에 지나친, 그 멍청한 희생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어느 날 당신은 고속도로에서 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흰 눈송이 같은 것이 차 유리창을 스치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떠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밤꽃 향기 진동하는 오월의 따스한 밤, 그 많은 눈송이들이 앞서가는 닭장차에서 날려오는 하얀 닭털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경이를 아직도 기억하는가. 십 층도 넘는 철망 아파트 칸칸이 분양받은 수백 마리 하얀 닭들이 쇠기둥 사이로 모가지를 빼내 물고 파들파들 떨면서 날려 보내던 흰 날개 깃털들, 애초에 겨울에 오는 흰 눈도 그렇게 해서 빠진 가엾은 깃털이었던가. 어쩌면 그 흰 터럭지는 입관 직전 알코올에 적신 거즈로 마구 문질러 시멘트 바닥에 흩어지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머리칼이 아니었던가.

<중략>

어느 날 당신은 교회신자들 야유회 같은 데서 보신탕 파티에 끼어본 적 있는가. 다리 아래 솥 걸어놓고 진국이 펄펄 끓는 동안 가정과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 끝나 저마다 뜨거운 국물을 나눌 때, 평소 사람 좋은 신도회장이 무슨 꼬랑지 같고 막대기 같기도 한 작은 것을 잡아 흔들며

“에, 이 만년필로 말할 것 같으면……” 하고 걸쭉한 농을 할 때, 온몸 다 바쳐도 끝나지 않던 죽은 짐승의 치욕을 오래 생각한 적은 없는지. 뜨거운 국물에 졸아들 대로 졸아든 그것이 전생의 당신 몸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혹시 내생의 것은 아닐는지.

유치한 당신, 당신은 잊지 못할 것이다. 눈에 흙 들어갈 때까지, 눈에 흙 들어간 뒤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몇 해 전 구제역이 돌았다. 당국의 명령에 따라 많은 생명을 땅에 파묻었다. 목숨을 끊어 묻는 것도 아닌 생매장이었다. 우리는 그 일을 ‘살처분’이라 하였다. ‘처분’한다는 말에 담긴 생명 없음. 그러나 마지막까지 꽥꽥대는 소리와 함께 기어오르는 몸부림, 생명 있음. 그 몸부림을 한사코 밀어내던 사람들 중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처분했던 생명들과 함께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사람이 곧 개돼지이기도 한다는 것은, 술자리에서 무심코 99%의 사람들을 빗대었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한 어느 공무원의 발언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개, 돼지가 아니었던가.

그 깨달음은 언제 왔던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만 사는 줄 알았다가, 어느 때 부닥친 삶의 비의(秘意) 속에는, 사람도 물고기도, 개도 돼지도, 풀과 바람과 흙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세월호의 아이들은, 4대강의 녹조 속에서 가파른 숨을 몰아쉬던 물고기도 되고, 그 겨울에 언 땅 속에 들어가야 했던 돼지들도 되고, 당신의 몸은 이제 고장났습니다라고 선고받은 내가 되기도 하였다. 삼라의 만상, 삶과 죽음이 뒤엉켜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다가온 것은 ‘슬픔’이었다.

그것을 언제 깨달았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떨림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춘기였나, 거대한 불의와 그에 맞선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20대였나. 나에게 화인(火印)과도 같이 남았던 장면과 그 순간들에, 나는 이기지 못하도록 술을 먹은 후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 내면서 그 슬픔을 가슴속에 꾹꾹 담으리라, 결코 누구에게도, 꺼내어 그대로는 보여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것 같다.

정녕 그렇게 되었던가.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어, 그래야만 살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술을 곁들여 시끄러운 다툼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하루를 용케 견디었구나, 지쳐 돌아가는 밤 시간, 강바닥의 뻘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 장면들은 울컥, 어느 순간 부유하며 떠오른다.

그때, 저 멀리 시인이 홀로 서서 서늘하고 고통스럽고 투명한 시선으로 가만히 부른다. ‘유치한 당신’이라고.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아마도 죽어가는 순간, 나는 내가 알았던 그 모든 것들을 소환하게 될 것이라고. 내가 결코 알지 못할, 내 삶 이후의 시간에도 말이다.

정연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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