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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성적인 사랑

등록 2016-09-30 19:21수정 2016-09-30 21:40

[토요판] 이주의 시인, 이윤학
내손동*

은행나무 둘레에 버려진 자취 살림도구들
엠디에프옷장과 침대와 두 칸짜리 비닐소파와 냉장고와
비닐봉지에 쑤셔 박힌 이불 더미와 말라비틀어진 화분과
심하게 금이 간 어항 속 인조 물풀들이 은행잎에 덮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골목으로 진입하자
하수구 뚜껑들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붉은 끈을 동여맨 잡지 더미에서
<1990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과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을 꺼낸다

예쁘고 착해 보이는 규진이 언니
열심히 살아가세요

생일 축하하고
이성복 씨 같은 내성적인 사랑은 하지 마라

약수터 어귀 미루나무는 저녁 어스름을 꼬챙이로 꿰매 들고
소통 불가능한 말을 흘린다 풍 맞은 남자는 무당의 무음
방울지팡이를 바닥에 꽂고 돌리면서 딴청을 부린다 그는 지금
오래된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자전거로 귀가하는 남자는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핸들을 비틀어 잡는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바로
언덕으로 치달으며 이륙하는 제트기 소리를 낸다

눈물이 쏙 빠지는 행복이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당신의 만성비염까지 사랑하기에 이를 것이다

축축한 등줄기 결리는 은행잎에 누워 쿠린내와
약수 맛과 외국으로 나가는 여객기 배때기에서
시작된 휘파람을 부를 것이다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짙은 백야> 수록

공원 잔디에 누워 여객기를 바라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거대한 상어의 배때기와 만나게 되고 상어 뱃속에 든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이곳이 바닷속이라는 상상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휘파람을 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외국바람을 먹어보지 못한 내가 외국 나가는 사람들과 외국에서 살다오는 사람들을 위해 휘파람을 불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내 휘파람 속의 외국에 내손동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길을 잘못 들었다 하기엔 그곳에서의 한나절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낮은 집들이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동네의 풍광에 푹 빠진 나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약수부터 들이켰다. 약수터의 미루나무를 바라보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도 오지 않는 어린 날의 추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바깥마당의 쪽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미루나무는 베어진 지 오래되었다. 미루나무 잎사귀들이 생선비늘 냄새를 불러오기 위해 요란스럽게 까탈을 부리고 있었다.

동네를 몇 바퀴 돌았을 때에야 비로소 단풍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버려진 궁색한 자취 살림도구들 귀퉁이에 붉은 끈에 묶인 책 더미가 보였다. 거기서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을 꺼내들었다. 단출한 이삿짐을 꾸려 떠나는 이가 규진씨인 모양이었다. ‘예쁘고 착해 보이는 규진이 언니/ 열심히 살아가세요’ ‘생일 축하하고/ 이성복 씨 같은 내성적인 사랑은 하지 마라’ 두 사람이 규진씨 생일 선물로 준 시집인 모양이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하수구 뚜껑을 밟고 동네를 빠져나가는데, 그동안의 ‘내성적인 사랑’을 들킨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엔 얼굴이 화끈거리고 시간이 흐르면 가슴이 아파 먹먹하게 되는 것. 파편 같은 여객기가 지나가고 풍 맞은 남자가 지팡이를 짚고 제자리를 걸었다. 라면 끓이는 냄새가 달려오고 생일인 줄도 모르고 라면을 끓여 먹고 나온 남자가 풀밭에 앉아 등에처럼 시든 토끼풀꽃을 헤치고 있었다. 그이를 보고 나는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눈물이 쏙 빠지는 행복이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당신의 만성비염까지 사랑하기에 이를 것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늙은 시절과 대면하고 있다. 다 살아버린 듯이 울컥해져서 그를 통해 나를 떠올리고 아픔을 만들어낸다. 어머니가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 있다. 물뱀을 독사로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다. 그보다는 상처를 발명해내는 재주를 타고난 게 아닐까. 내 안에 들어온 그들은 왜 상처투성이가 되고 삽날에 목이 찍힌 뱀이 되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어디로도 갈 수 없으면서 어디로든 갈 수밖에 없는 그들과 나는 한 몸이 되곤 한다. 그래서 잔디에 누워서도 심해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곁에 있어 의식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결국 어떤 말로도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안 이상 내성적인 사랑은, 언젠가는 당신이 호흡한 공기를 내가 호흡하게 되리라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었다. 내가 호흡한 공기를 언젠가는 당신도 호흡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여객기 배때기를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고 여객기 배때기를 보면서 휘파람 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여객기 배때기에서 시작된 휘파람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옛날 내손동을 거니는 나를 위해 휘파람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나를 위해, 또한 다시 태어나는 당신을 위해, 17년째 꼬깃꼬깃 간직한 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곳에서 살고 싶었는데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땐 너무 훼손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당신이 그리울 때 호흡을 가다듬고 내손동을 읽었다. 나는 지금에 와서 짝사랑 당신과, 그곳에서 17년을 숨어 살았다고 우기는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과 제대로 살기 위해, 17년을 기다려 왔다고 울먹거리는지도 모른다.

이윤학 시인

※196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시집 <먼지의 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그림자를 마신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나를 울렸다> <짙은 백야>, 장편동화 <왕따> <샘 괴롭히기 프로젝트> <나 엄마 딸 맞아?>, 산문집 <불행보다 먼저 일어나는 아침>을 펴냈으며 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랑, 시차가 아닌 공차(空差)

이사를 하고 나면,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식물성임을 알게 된다. 살던 곳에서 가볍게 뽑혀 몇 시간 만에 다른 땅에 이식(移植)된 인간-식물은 훼손과 박탈의 느낌에 어리둥절해한다. 잔뿌리들이 잘린 채 낯선 땅의 생흙에 억지로 몸을 맞추노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이사의 첫날 밤은 이식의 후유증으로 뒤척이기 십상이다. 집에서 집으로 옮겼을 뿐인데, 한낱 짐이 되어 실려 온 살림살이들은 너절하고 궁색할 뿐이어서 ‘나’의 삶이 온통 길바닥에 전시된 듯한 참담함을 안겨 준다. 어떤 아름답고 귀한 추억의 물품도, 초라한 이삿짐이 되는 순간 ‘노출’과 ‘전락’을 피할 수는 없다.

이윤학은 내손동으로 들어오는 이삿짐에서 ‘내성적인 사랑’의 운명을 본다. 내손동은 ‘내성’과 유사한 어감을 지녔거니와, 내성적인 인간들의 거주지 혹은 안으로만 다독여진 내면 공간을 상징한다. “저녁 어스름을 꼬챙이로 꿰매 들고/ 소통 불가능한 말을 흘”리는 “약수터 어귀 미루나무”와 “무당의 무음”에 기대는 “풍 맞은 남자”는, 자신의 내부에 갇혀 출구를 잃은 내성(적인 인간)의 극적인 이미지이다. 내손동은 경기도 의왕시라는 실제 장소와 별개로, 가장 고독하고 후미진 내성의 처소를 뜻한다.

이삿짐 중 선물받은 시집에 쓰인 “내성적인 사랑은 하지 마라”는 말은, ‘내손동’의 슬로건이자 금기어의 역할을 한다. 내성(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노출되는 순간, 미미하고 값없는 것으로 전락하기 쉽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이삿짐처럼. ‘나’로부터 ‘당신’에게로 옮겨가기 위해 ‘당신’ 앞에 노출되는 마음이, 초라한 이삿짐을 불사하는 귀하디귀한 ‘사랑’임을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나’ 또한 “그 시절의 당신”에게 그러하였음을, 17년이 지나서야 깨닫노라고 이윤학은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시차(흔히 말하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공차(空差)의 문제겠다. ‘시차’라는 말은 있되 ‘공차’라는 말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인데, 이윤학은 내성적인 사랑을 “휘파람”으로 표현하면서 ‘나’와 ‘당신’의 공차가 사라지는 순간을 꿈꾼다. “언젠가는 당신이 호흡한 공기를 내가 호흡하게 되리라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다”. 함께-있음은 시차를 문제 삼지 않는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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